한국희곡

김연재 단막 '대경사'

clint 2017. 6. 23. 11:32

 

 

 

작품 의도

 

서교동 339-23번지. 그 집은 망한 왕조 크메르의 대사관이었습니다. 몇 차례 색을 바꾼 파란색 대문은 두 짝이었는데 한 짝은 성인 남자의 한 아름으로도 모자랐습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은 나의 할아버지 김태호와 나의 할머니 조은황이었습니다. 김태호와 조은황은 초인종을 요비링이라고 불렀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꼭 일본어로 비밀 얘기를 했습니다. 대문이 서 있는 좁은 바닥에는 종종 정원의 눈향나무 열매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대문이 열릴 때는 매우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정원에는 목련, 잣나무 다섯 그루, 모과나무, 단풍나무, 사철나무, 눈향나무, 목단, 붓꽃, 아홉까지 색깔의 철쭉,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수북이 자란 잔디 사이에 디딤돌이 있고 꽃들 가운데에 윤이 나는 암석으로 만든 작은 탑이 있었습니다. 좌측으로 매끈한 마당이 있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김태호는 욕조의 물을 대야에 받아 세수하고 손을 씻고 발을 씻고 화초에 물을 주거나 변기에 부었습니다. 그러면 물이 내려갔습니다. 나의 방에는 안테나가 달린 작은 텔레비전과 붙박이장, 플라스틱 서랍장, 나무 서랍장, 책상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서랍장을 빼닫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벽지가 가장 싫었습니다. 나와 동생은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나의 할아버지 김태호는 동물의 왕국, 씨름, 뉴스, 가요무대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조라 히바리와 홍도야 울지마라를 좋아했습니다. 내 유년기의 가장 선명한 기억은, 눈을 감고 라디오를 듣는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2층에 오르면, 오늘이 첫 방송인 것만 같은 설레는 라디오 소리와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음색 그리고 그것을 눈감고 듣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나의 할머니 조은황은 모두가 다 잠들면 식당 방에서 휴지를 베개 삼아 베고 흑백 서부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옥수수를 좋아했습니다. 식당 방은 할아버지가 담뱃불로 지진 까닭에 여기저기 까맣게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부채들이었습니다. 나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심심해서 부채를 만들었습니다. 마분지 양면에 달력이나 신문에 실린 그림을 오려 붙이고 네 테두리에 색깔 전기 테이프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것 몇 백 개가 큰 화분에 꽂혀 있습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심심했는지 항상 문풍지를 바르고 문지방을 칠하고 고장 난 옷장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입원해있던 병원의 회전문을 빙빙 돌았습니다. 심심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나의 우주는 지금 미국의 한 지명을 딴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되었습니다. 실은 크메르였는데 말이죠. 나는 종종 그 집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집이 몹시 물리적으로 나의 작은 방에 우르르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나의 외로움도 그 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내가 펜을 잡고 책상에 앉는 일도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일도 그 집의 기운을 빌어 하고 있을 겁입니다. 방음이 잘 되는 아파트로 이사 간 나의 할머니 조은황의 시간을 생각하며 썼습니다.

 

작가소개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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