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를 빼 싸구려 고물 배를 사서 바다에 무작정 나서면 뭐하나, 이 세상이란 것이 어딜 가든 지들 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 라는 지긋지긋한 테두리 속에 똑같은 모습일 뿐이지. 그냥 무관심하거나 지나친 관심을 가지며 그 나라가 어디건 그냥 살 일이다.
에필로그에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눈먼 노파와 손에 든 권총이 보여주듯 지독하게 독해졌을 영희를 태우고 노인의 관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는 한국의 국가주의와 부조리한 현실에 환멸을 느낀 한 가족이 자발적으로 국적을 포기하고 망망대해를 떠도는 표류기다. 한국 사회와 국가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하씨는 “희곡은 엄격한 형식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매혹적”이라며 “대사 하나하나가 기능적이고 암시적이어서 문학적 격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종교를 믿고 있지요. 한국이라는 종교 말이에요. 한국은 위대하다고 말하면 모두 용서하지요. 그러나 한국은 형편없는 나라라고 말하면 용서받지 못해요.” 가장의 이런 발언에 작품의 주제가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하일지의 〈파도를 타고〉에서 우리는 국가주의와 부조리한 현실이 싫어서 한국 땅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가족의 우스꽝스럽고 애달픈 표류기를 볼 수 있다. “제가 생존 경쟁에서 져서 한국을 떠나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러나 제가 한국을 떠나는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랍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싫어서죠.”, “15년 동안 일해도 집 한 칸 살 수 없는 나리에서 독도가 우리 땅이면 뭐합니까!” 같은 거침없는 대사는 하일지의 애독자들에게 〈경마장 가는 길〉을 처음 대했을 때 느낀 경험을 상기시켜 준다. 작가를 향해 “하일지는 한국사람 아니야?" 하고 악을 쓰게 한, 바로 그 경악감 말이다.
'파도를 타고'는 한국에서 중학교 선생으로 살아온 남자가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미지의 섬을 향해 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피부에 닿는 소재들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더 절절한 감동이 있다. 무엇 때문인지, 배에서도 김치 냉장고를 버리지 못하고 바다에 떠다니면서도 김치 냉장고를 버리지 못하는 장면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가령, 아파트를 사 3억을 벌었다고 칩시다. 그 경우 3억이라는 돈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건가요? 그건 미래의 실수이자, 특히 젊은이들이 갚아야 할 돈인 거예요.” 작가가 이 사회를 풍자하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곳곳에 등장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하일지(1955년 5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임종주이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프랑스로 유학가서 푸아티에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리모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0년 장편 《경마장 가는 길》을 민음사에서 발간하여 등단하였다. 이후 《경마장은 네거리에서》,《경마장을 위하여》,《경마장에서 생긴 일》 등을 발표하였다. 묘사적 문체, 작품의 순환적 구조 등을 통하여 새로운 소설적 실험을 펼쳐 보이는 작가로 평가된다. 현재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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