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근호 '로맨티스트 죽이기'

clint 2017. 5. 15. 13:13

 

 

 

 

귀신과 인간의 사랑, 귀신 잡는 비형랑 이야기다.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은 생전에 자신이 탐했던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귀신이 되어 그녀를 찾아간다. 이후 도화녀가 아들 비형을 낳자 그 소문을 들은 진평왕이 그를 데려다 키운다. 밤마다 귀신들과 어울리던 비형은 왕의 명령으로 하룻밤 만에 다리를 완성하기도 하고 귀신 중 길달이라는 자를 추천해 정치를 돕게 한다. 왕은 길달을 자식이 없는 각간(현재의 총리) 임종의 양아들로 삼게 하여 흥륜사 문을 짓게 한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이후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고 사람들은 비형의 노래를 만들어 귀신을 쫓곤 하였다.

 

 

 

 

 

'로맨티스트 죽이기'는 삼국유사 속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를 끌어들여 권력 내부의 야합, 암투, 권모술수, 권력자들의 이상과 욕망을 그려낸 것이다. 영화 또는 TV 정치드라마 같은 연극이다. 우선 눈요깃거리가 많다. 정치판을 조폭의 세계 같은 느낌을 받도록 묘사하는 가운데 '안가정치', '밀실정치', '요정(술집)정치'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여자 배우들은 하나도 없이 15명의 남자배우만 나온다. 코러스 배우들은 여러 장면에서 현란한 무술 동작을 보이기도 하고 광란의 춤을 춘다. 극 중 로맨티스트를 상징하는 인물인 길달의 알몸 연기도 있다. 길달은 종종 마이크를 들고 연설하듯 대사를 친다배우들은 극장 내 객석과 객석 사이의 통로에서 점프 동작 등을 하며 시선을 모은다. 무대의 좌우 양쪽 벽면에 커다란 수납공간을 만들어 코러스 배우들이 무대에서 쓰는 소품들을 얹어두었다가 꺼내 쓰는 장면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거의 마지막 장면에 객석의 관객들이 조명을 통해 극 속의 '도깨비'(민중)로 편입되도록 하는 연출도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영화 같은 영상이 있다는 점이다. 코러스 배우 중 한 명은 무대 위에서 거의 쉴 틈 없이 영상카메라 촬영을 하고 돌아다닌다. 극 중 주요 인물들의 모습은 무대 뒤 안가 같은 이미지의 대형 아크릴유리 상자 공간 사이로 투사된다. 영화 같은 연극의 느낌을 짙게 풍길 만큼 OST 류의 배경음악이 시도 때도 없이 흐른다. 랩과 트로트, , 일렉트로닉 음악 등 세대를 초월하는 다양한 음악들이다.

 

 

 

 

 

내용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허구의 정치판 이야기다. 핵심은 '로맨티스트'의 전형인 길달과 '리얼리스트'의 상징인 비형 간의 대립. 꿈꾸는 자인 로맨티스트 길달은 결국 죽는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면은 대사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길달은 말한다. "이 세상과 소통하는 꿈. 내가 여우로 변할 수 있다는 건 새, 나무, 바위, 하늘, , 이 자연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거야. 친구처럼 말이야. 수평적인 세상! 대칭의 세계." 이런 길달의 말에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비형은 받아친다. "난 저 나무랑 친구하고 싶은 생각 없어. 친구를 땔감으로 쓰게 되면 얼마나 슬프겠냐? 사람은 사람으로 살고 늑대는 늑대로 살아야 돼. 위는 위, 아래는 아래. 이게 세상의 법칙이야. 수직! 비대칭의 세계." 길달은 또 민중에 대한 애정도 드러낸다. "(저들에게) 명령하지 않아. 부탁하고 질문하고 듣고, 대답해. 사람들은 저들 보고 도깨비라고 하지만 아니야.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일 뿐이지." 길달과 비형은 모두 지륜도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또 한 사람의 제자는 자웅동체의 신비한 느낌을 주는 술집 주인 도화. 정재계 인사가 드는 고급 술집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권력자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인물이다. 같은 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 셋 사이의 밀치고 껴안는 관계의 흐름이 극의 재미를 돋운다. 여기에 흥륜사 문 건설로 상징되는 국가의 대규모 건설프로젝트를 둘러싼 대립,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 만드는 냉엄한 정치현실, 민중을 상징하는 도깨비들의 존재 등 이야기가 끼어들어 장면의 흡인력을 높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재미는 약간의 독도 된다. TV 정치드라마 같은 구성, 영화를 연상케 하는 빠른 흐름의 장면들은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하고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지금의 정치상황에 맞게 억지로 짜맞춘 듯한 인상도 있다. 오락적 요소가 강한 정치풍자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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