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경주 '블랙박스'

clint 2017. 5. 19. 08:56

 

 

 

연극 <블랙박스>는 비행기가 이륙한 뒤, 11시부터 자정까지 구름 속에 머무는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다룬다. 비행기는 구름 속에서 발견한 불빛을 관제탑에서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따라간다. 하지만 비행기는 기묘한 구름 속을 헤맬 뿐이다. 착륙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서 한 시간 동안, 하지만 지상의 시간으로는 무려 이틀 동안이나 실종된 채 활공을 반복하고 있다. 미아가 된 비행기는 우리가 해독할 수 없는 시차 속에서 멀미를 한다. 또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허공과 언어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기묘한 섬에 도착한 듯 이야기의 시차는 천천히 깊어 간다. 이 작품은 추락을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진실과 우리 인생의 굴곡, 현대인의 불안을 기내에서 보여준다.

김경주 작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 곧 떨어질 거란 방송을 들으면 벗었던 신발부터 제일 먼저 신게 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사회 흐름이 변하고 있다. 감추어진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고 설명했다이어 "줄거리가 난해한 작품이지만 이런 작품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일종의 부조리극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과 현대인의 불안을 얘기하고 싶었다." 고 말했다.

 

 

 

 

 

장정일 추천의 글

김경주 시인의 블랙박스는 일곱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고 지문에 명시되어 있지만, 실은 카파, 미하일, 스튜어디스만으로 공연 가능한 작품입니다. 무대가 비행기 기내로 극소화된 대신 작가는 물방울, 물웅덩이, , 푸르고 비린 냄새, 떠다니는 눈, 교미 중인 구름 같은 비시각적이고 공감각적인 요소를 한껏 동원해서 독자와 관객들의 공간적 상상력을 우주로 넓혀 놓으며, 시간적 상상력마저 고무줄처럼 늘여 놓습니다. 공포와 추방이라는 실존의 형벌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실감하거나 사태에서 도피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고작 폭력과 섹스가 꼽히지만, 작중 인물 중 한 사람인 카파는 줄곧 언어에 의한 구원 가능성을 멈추지 않습니다시인과 소설가가 쓴 희곡이라고 해서 별도의 유형화가 가능하다거나, 그런 작업이 손톱만큼의 의미라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유형화가 가능하려면 시인과 소설기들이 쓴 희곡의 균일하고 항구적인 특정이 재생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는데, 우리는 아무도 그런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계속 출간될 이 작품집에 참여할 작가들은 어떤 제약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말하기로 한다면, 이번 작품에 실린 작품들의 공통된 특성들을 거론한 수도 있겠지만(비밀입니다), 그 몫은 이 책을 읽어 주시고 무대에 올려주실 연극인들께 맡기고 싶습니다.

 

 

 

 

작가 인터뷰

- <블랙박스> 이야기부터 하자. 부제가 추락을 겪어야 알 수 있는 진실이다. 참 시기적절하다. 부제만 보면, 이 작품이 왜 7년이나 공연되지 못하다 이제야 빛을 보는지 알 것 같다. : 블랙박스는 사고가 나야 열어볼 수 있는 장치 아닌가. 차량 블랙박스야 언제든 열어볼 수 있지만. 부제에 밝혔듯이 블랙박스란 사고를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진실이다. 그런데 블랙박스를 열어본다 한들 우리가 얼마나 진실에 닿을 수 있을까? 항상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그곳에 어떤 사실이 존재했었는가보다 결국 그곳에 닿으려는 상상력에 주목해왔다. <블랙박스>는 기내라는 상황을 던져놓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보이지 않는 공간에 닿으려는 이야기다.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치유나 감정의 정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의 구석에서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내역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게 의도였다. 공연 전 희곡이 이북(e-book) 형태로 번역돼 몇 차례 외국에 소개되었고, 외국 대학에 세미나나 특강하러 갈 때 종종 소개했는데 꽤 흥미로워했다. 초고부터 한국적인, 토속적인 특징을 갖기보다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 헤겔이 말한 세계시민으로서 누구나 한번 정도 고민해보는 불안에 주목해서 그런 느낌들을 추구해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외국 공연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 공연이 이뤄진 거다. 하지만 외국 공연 전에 모국어로 꼭 한번 무대에 오르는 걸 보고 싶었다.

 

-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 연극, 말 진짜 많다!’ 과장해서 말하면, 두 시간 동안 쏟아지는 수많은 말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뭘 말한다기보다 말하고 싶은 걸 일부러 숨기는 것 같았다. 말 속에 숨겨둔 진짜 말은 무엇이었나. ;

<블랙박스>는 하나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비행기가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설정이 주는 불안이 그것이다. 사람은 불안하면 말 뒤에 숨는다. 그런 인간 안에 있는 불안을 형상화하기 위해 여러 형식과 질감을 고민했다. 구조는 서사적이라기보다 알레고리적인 형식으로 접근했고, 문체도 리얼리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대사 역시 문어체와 구어체의 중간에 해당하는 화법을 사용했다. 관객을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하거나 난해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다. 이러한 장치들은 인간은 왜 불안하며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고민이었고, 그 질문들이었다. 작품 구상은 실제 내게 일어난 일을 모티브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다 난기류가 오고 있다는 기내 안내 방송을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100석 남짓한 소형 비행기 안에 외국인 한 명과 단 둘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둘 다 자연스럽게 신발부터 신고 있더라. 비행기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신발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희화화였다. 그것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다룬 게 <블랙박스>. 부조리는 인간의 비극성을 희극성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에서 발생하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말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하는 질문이 담긴 연극 형식이다. 거기서 무수한 말은 무의미해지고, 넘치는 말보다는 침묵이 주인공일 수 있다. 그런 점에 주목해주면 좋겠다.

 

 

 

- 미련한 관객은, 그 많은 말을 굳이 이해하려 했다. :

이 작품에선 말의 무의미함을 말하기 위해 말이 필요한 것이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관객이 말에 집중하게 하려고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나는 꾸준히 시극운동을 해왔다. 거의 멸종하다시피 한 시극을 시와 연극을 하는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꾸준히 쌓아온 작업 중 하나가 이번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시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것, 침묵, 행간, 여백, 사이 등을 극성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번 역시 침묵의 질을 표현하고 싶었다. 불안 속에서 언뜻언뜻 만나는 침묵을 주목하면 오히려 말 뒤로 감추어진 불안이나 불안해지면 말 속에 숨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기내극이라는 양식은 어떻게 고안했나?

기내는 허공이지 않나. 땅이 아닌 곳에서 인간의 일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극적 공간으로서 매력이 있었다. <블랙박스>를 포함해 두세 편 기내극 시리즈가 있다. 비행기 안,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극을 더 선보일 예정이다. 기내극에선 의미보다는 상태를 따라와야 한다. 구름 위라는 상태는 내게 여러 가지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가 김경주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서울 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해 문단에 나왔고,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 무경계 문회펄프 연구소 츄리닝 바람을 운영하며 다양한 실험극(무언극, 시극 등)을 기획, 연출하고 있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이 있고, 산문집 <PASSPORT> <펄프키드> 등이 있다

시작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재림 '눈의 여인'  (1) 2017.05.21
하일지 '파도를 타고'  (1) 2017.05.19
차근호 'Mr. 쉐프'  (1) 2017.05.15
차근호 '로맨티스트 죽이기'  (1) 2017.05.15
김승철 '툇마루가 있는 집'  (1) 2017.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