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또한 당당한 삶을 산 작가이다. 80년대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포효하던 그는 항상 기존 정치계를 비롯한 사회에 냉철한 시각으로 거침없이 직격을 날리는 언론인으로도 유명하다. 원작에 무한한 경외감을 갖고 소설 [숙부는 늑대]를 대했을 때 너무나도 극적인 삶을 살았던 주인공 김철식은 꼭 무대에 올라가야 할 인물이며 이런 인물이라면 우리 대신 속 시원히 할말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모두 공감할 것이다. 모든 상식과 통념과 권력으로 둘러싸여 몰개성화, 소시민화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가슴을 활짝 열고 한 판 시원한 연극을 공연하고자 한다. 정치할 사람은 따로 있고 큰 정치판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고 1인 유세, 1인 데모를 감행하는 김철식자신에게는 공부보다 더 소중한 삶이 있고 남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에 당당하기만한 해리. 이들을 통해 자신의 삶이 가장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자 한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시는 애국 시민 여러분!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시켜 드리려고 나왔습니다.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무슨 후보가 공약은 이야기하지 않고 뻘짓이냐? 하고 생각하실 것이외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이란 모름지기 어때야 한다는 것을 외람 되나마 여러분께 올리고자 합니다. 해리라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해리는 힙합이라는 댄스에 푹빠져 있는 소녀입니다. 해리는 댄스댄스 팀이라는 힙합그룹에 속해 있는데 이제부터는 줄여서 DD라고 하겠습니다. 여하튼 이 팀은 오디션을 3일 앞두고 있었는데 해리는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하여 고민하였던 모양이올시다. 이 아버지는 학교까지 그만두겠다는 딸을 어찌할 바 모르다가 자신의 삼촌 김철식의 일기장을 딸에게 주었습니다. 왜냐? 딸을 보니 삼촌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신을 홍모처럼 버렸던 삼촌 김철식.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굴곡진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 안으며 한 마리 늑대처럼 살 길 원했던 김철식.
이 김철식이란 인물의 삶이 또 그렇게 파란만장할 수 없습니다.
젊었을 적 여운형 선생이며 김구 선생의 영정을 모아 놓고 곡하질 않나,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세 번이나 출마하여 보기 좋게 떨어지고는 자기는 늑대라며 혼자 데모하러 댕기고 선거자금 마련한다고 옴약장사로 나서는 그런 사람이올시다. 해리는 일기장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불의에 맞서 울부짖는 삼촌과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과연 해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여러분! 이 후보 가진 것 불알 두쪽 밖에 없지만 처음 그 마음 변함없이 정의 속에서 자유로이 사는 저 김철식처럼 살아가고자 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것이 제 공약이올시다.
그리고 삼촌의 삶과 해리의 선택이 궁금하신 분은 극단 아리랑이 만든 연극 "기호0번 대한민국 김철식" 을 꼭 보시고 공감의 박수가 나오시는 분은 저에게도 한 표를 던져 주시길 바라며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숙부는 늑대>라는 최일남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이미 동일한 이름으로 동극단에서 각색 공연된 바 있다. 이렇게 한 번 원작 그대로 공연된 작품이 다시 '기호 0번 대한민국 김철식'이란 이름으로 재공연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를 맞아 총선시민연대가 의도하고 있는 시민운동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미 많은 매스콤을 통해 이 작품의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소개되고 있었던 바이지만, 이것이 진정 이 극단이 의도한 목표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작품은 극중극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극중극의 포괄구조와 내적구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이러한 극짜기는 어쩌면 극단 아리랑이 즐겨 만드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장치이다. 특히 소설을 각색한 작품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더욱 그 장기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중인물 김경수(김비오 역)는 우연히 딸 해리(윤혜영 역)가 힙합 댄스의 오디션에 참가하고자 학교 공부보다는 춤연습에 더 몰두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안 그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딸의 이러한 행동을 극력 반대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삼촌 김철식(박철민 역)의 일기장을 딸에게 건네 준다. 자신이 18세일 때 4.19 시위에 나갔다가 사망한 삼촌에 대해 자신의 딸이 18세가 되도록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객관적 상황도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왜 자신의 딸에게 일기장을 건네 주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해명이 없다. 물론 김경수는 해리가 김철식의 일기장을 읽게 함으로써 김철식이 자신만의 고집스런 삶을 살다가 어떠한 최후를 마쳤는가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딸에게 심어 주려 의도하였겠지만, 그 직전의 삼촌에 대한 회상의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단지 극중극으로 인도하는 흔한 장치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매년 4월 19일이 되면 제사를 지내 주는 대상인 삼촌의 정치적 의식은 분명 딸의 춤에 대한 열정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며, 이는 역시 그 이후 계속되는 극중극 속에서의 김철식에 대한 김경수의 대응 방식에서도 잘 드러나는 점이다.
결국 이 작품은 김철식-김경수-김해리의 3대에 걸친 삶의 선택의 문제를 기본 구조로 하여 갈등을 형성하고 해결하는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경수는 없다. 그는 누구인지,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김철식의 삶을 보면서 왜 그는 지금과 같은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 왜 김해리의 선택에 대해서 반대하는지 등등에 대한 해답을 이 작품은 지니지 못하고 있다.
원작 소설을 보지 못한 입장에서 작품 자체의 구조에 대한 언급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원작이 어떻든간에 관객과 대면하여 살아 있는 행동으로서 무언가의 주제를 드러내야 하는 공연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 작품의 각색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의도적으로 김철식의 삶을 '순진'하게 몰고 가서, 그가 바친 열정과 순수한 정치성은 망각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인물로 희화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단 애자를 만나서 힘들어하는 한 장면 말고는 김철식은 껍데기만 지니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다가오는 총선을 겨냥한 시민의식 고취를 위한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메시지 전달로는 공감을 얻기 힘들다. 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극장 문을 나선 한참 뒤에라도 김철식의 삶과 선택에 공감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김철식을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한번이라도 만나기를 원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극중 김철식은 변화 없는 고정적인 톤으로 '김철식은 고독한 늑대'임을 외칠 뿐이나, 그의 모습에서 '늑대'를 발견하는 것마저도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이에 비해 김해리는 신세대다운 개성을 드러내며 삼촌 김철식의 외골수를 닮고 있지만, 학교 공부보다 춤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 또래가 흔히 지닐 수 있는 선택의 문제이지, 김철식이 동시대의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홀로 '늑대'로 남기를 원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성질이다. 즉 김해리의 선택과 김철식의 삶을 하나로 연결하기 위한 고리로 단순히 김철식의 일기장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그 무게가 너무 기울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김철식의 선택마저도 힙합 댄스를 선택하는 것 정도의 비중밖에 지닐 수 없게 되고 만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각 인물의 변화이다. 극중극 속에서 김철식의 변화, 학생으로서의 김경수와 한 가장으로서의 김경수의 삶의 변화,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의 삶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김해리의 변화가 그것이다. 김철식의 삶의 선택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으려면, 역시 김해리의 변모 과정이 설득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바로 이러한 변모 과정이 유기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위의 세 인물의 연기도 너무나 고정적이어서, 오히려 부수적인 인물인 김경수의 아버지 김만식(김태민 역)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인물로 다가오는 점도 한번 반성하여 볼 점이다.
무대장치도 이 작품의 의도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추상적인 포괄구조의 틀과 회상 장면으로 인도하는 액자의 틀로 나눈 무대가 굳이 필요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김철식이 마지막으로 일기를 건네 주는 장면 외에는 사막(絲幕)의 기능이 적절히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자유롭게 현실과 회상 장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조명만으로도 적절히 처리가 될 수 있고, 또한 많은 장면에서는 이러한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오히려 텅 빈 무대가 김철식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에 더 적절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점은 이 작품이-극단의 의도이든 아니든 간에-김철식의 삶을 통해 '이러한 인물을 뽑자'라고 하는 메시지 전달에만 신경 쓴 까닭 때문이라고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연극은 연극만의 고유한 전달 방식이 있다는 것, 서사와는 달리 많은 부분이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과 인물 사이에, 그리고 그 인물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미덕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관객과의 적절한 교감을 통해서 김철식의 삶에 공감을 하게 하고, 자칫 경직되기 쉬운 정치적 메시지를 웃음 속에서 적절하게 피워낼 수 있게 한 것은 분명 아리랑의 연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는 다만 웃음 속에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연극만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부족한 점만을 골라 다소 과장되게 부언한 것이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김철식 같은 사람을 국회로 보내기 위해서는 김철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극장문을 나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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