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무대는 배경 가까이 정사각의 크고 작은 입체 조형물이 가득 쌓여있고, 상수 쪽에는 사각의 단 위에 출연자가 인체 조각 작품처럼 서 있다. 무대중앙에는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면 문이 열리듯이 역시 비밀번호 역할을 하는 출연자가 앉아 있고, 하수 쪽이 일반 주택의 내실이다. 한 집의 가장이 하던 일을 마치고 술 한 잔 걸친 채 귀가한다. 골목에 서있는 조각상 앞에서 늘 상 하던 손짓과 인사를 하고 집 앞에서 역시 현관 앞 버튼 역할을 하는 조각상의 손바닥을 눌러 번호를 맞춘 후 방으로 들어선다. 음주상태의 가장의 귀가를 반기는 아내가 있을까? 아내는 싫은 소리를 하며 어서 잠이나 자라고 한다. 가장은 침대인지 소파인지 모를 조형물에 쓰러져 잠이 든다. 잠이 들면 항상 마녀가 나타난다. 백설 공주의 여왕처럼 거울아 거울아를 외치며…. 꿈속에서인지 생시인지 마녀나라의 백성들은 삶 자체가 어려움으로 설정된다. 마녀 여왕의 부패와 국정농단으로 백성들은 마녀를 규탄하는 궐기를 한다. 당연히 경찰도 등장을 한다. 이러한 가장의 꿈은 반복이 되고, 마녀는 결국 퇴출된다. 그래도 나아질 것 없는 현실은 똑 같이 반복되고 이제는 아내까지 직장에 나가 일을 해야 생활이 된다. 늘 상 하던 대로 가장의 귀가가 반복이 되면서 골목 앞 인체 조형물에게 손짓을 하고, 집 앞 인체 조형물의 손바닥 번호를 누르며 집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이번에는 아내가 똑 같은 음주상태로 귀가를 하고, 똑 같이 인체조형물에 손짓을 하고 똑 같이 손바닥 번호를 누른 후 집안으로 들어와 항상 남편이 쓰러져 잠이 드는 장소에 아내도 쓰러져 잠이 드는 모습에서 연극은 끝이 난다.
심사평
올해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은 새롭고 다양한 응모작들로 풍성했다. 100여 편이 넘는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나름대로 동시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4·19 민주화와 5·16 성장의 논리라는 두 축이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 질서로의 변화를 꿈꾸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학 또한 변화하는 시대를 해석하고 표현해 내어야 하는 시점에서 올해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은 풍년이다. 마트에 갇혀 살아가는 남녀의 변화를 기록해 나간 '마트 표류기'는 자기도 모르는 새 사육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무대 표현상의 특성상 연극보다 영화가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정한 '달팽이의 더듬이'는 지금 이곳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통시민 나대로의 일상과 비일상을 교차시키면서 절묘한 극적 구성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새로운 이유는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일상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우화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우리는 광장의 혁명이 축제로 변화고 폭력적인 힘이 유머와 해학으로 넘쳐흐르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영웅도 지사도 아닌, 보통사람 나대로 씨의 시각과 상상이 빚어내는 동시대적 글쓰기에 박수를 보낸다. 시나리오는 여전히 다큐멘터리적 소재에 머물러 있거나 사적인 난해함으로 포장된 앵글 속에 갇혀 있다. '국제고무' 같은 응모작은 누군가 전문 작가와 협력해 제대로 된 각본이 만들어지고 영화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선소감
문학을 하는 문청이라면 누구나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다. 그 병은 지독해서 당선 외엔 백약이 무효다. 이 바이러스라는 놈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문학 전 분야에 침투한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전 방위 게릴라적 독성을 지니고 있다. 증상은 10가지 이상은 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사후 증상이 심각한 편이었다. 응모 후 아무 소식이 없을 때, 큰 헛헛함으로 연말을 보내고 연시를 맞이했다. 그 상실감은 사랑했던 연인의 이별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이 같은 헛헛함으로 나날이 한숨을 쉬던 중 당선 통보를 받았다. 사실 희곡은 내가 가장 오랫동안 습작을 했던 장르였고 가장 많이 실패를 맛보았던 장르이기도 하다. 희곡 당선자의 면면을 보면 특정 학교 출신이라든가 유명한 선생님의 지도로 현장을 경험하거나 희곡을 배운 젊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어 주눅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값비싼 수업 대가를 치렀으니 꿀릴 건 없었다. 이번에는 나태함과 안이함을 버렸다. 무더웠던 여름에 글을 썼고, 버스 안에서 그리고 길을 걸어가면서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종이를 손에 쥐고 있는 동안 행복했다. 심사위원 선생님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린다. 거대하고 도도한 시대의 물줄기는 어느 외력으로도 바뀔 수 없다. 앞으로 어떠한 내일이 도래하더라도 나의 촉수는 벽과 그늘을 향해 살아서 움직일 것이다.
약력: 1966년 서울 출생. 2014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여수해양문학상 소설 대상 당선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현주 '오늘만 같지 않기를' (1) | 2017.01.10 |
---|---|
김연민 '명예로울지도 몰라, 퇴직' (1) | 2017.01.10 |
고군일 '자울아배 하얘' (1) | 2017.01.10 |
김영관 '올가미' (1) | 2016.12.16 |
김문홍 '실종' (1) | 2016.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