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조병 '성-시뮬라크르'

clint 2016. 12. 6. 20:59

 

 

 

( 원제 : 이혼연습 )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 역시 ‘시뮬라크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허상에 불과한 가상의 ‘이미지’의 포로가 되버리고 말았지요.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소비하고, 만들어진 스타 이미지에 열광합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바로 가상의 이미지 현실에 갇혀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입니다. 이렇듯 바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든, 즉 ‘simulation'의 과정을 거친 가상의 대상이 바로 ‘시뮬라크르’입니다. 우리 말로는 ‘가상 실재’ 혹은 ‘파생 실재’쯤으로 번역하는 모양입니다. 어려우면 ‘허깨비’ 정도로 이해를 합시다. 그런데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현실 속의 대상들보다 더 힘이 세고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현대 문화 이론가들의 견해입니다.
이 작품에서 시뮬라크르는 ‘ 안철수’와 ‘니나’라는 환상 속 인물로 등장을 합니다. 이들은 실재 등장인물인 천이숙과 이철우의 머리 속에 있는 허상들 입니다. 안철수와 니나는 천이숙과 이철우 각각이 욕망하는 이상형이요 욕망의 흔적들입니다. 하지만 욕망은 절대 채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욕망의 비밀이지요. 채워지려 하다가도 계속 자라는 것이 욕망라는 말입니다. 천이숙과 이철우의 불행은 바로 욕망의 전부를 채워줄 관념 속의 연인들(시뮬라크르)과 현실의 남편 및 부인을 일치시키려 한데 있지요. 그렇게 허상과 환상은 강력한 것입니다. 이들 서로의 진실한 대화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시뮬라크르입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우선 무대를 보면 달과 해가 눈에 띄지요? 이것은 ‘야행성’ 인간 이철우와 낮에 활동하는 ‘천이숙’을 상징합니다. 활동 시간이 다르니 서로 만날 기회도 없을 거고 대화할 시간도 없을 테니, 그 만큼 부부의 대화 단절과 간격을 강조하는데 적절한 상징도 없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아, 4개의 은박지기둥이 달린 이상한 설치물이 있네요. 연출가의 말로는 일종의 ‘완충지대’라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러한 공간/시간 이동의 완충지대라는 것이지요. 그 공간의 넘나듦은 바로 현실에서 환상으로, 그리고 환상에서 현실로 가는 문을 의미하는 셈이지요. 그것은 또한 광대의 박수소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설은 이후 ‘러시아 횡단열차’가 되기도 하죠. 사실 이 작품의 무대화는 무척 어렵습니다. 원작을 읽으시면 알겠지만, 작가가 요구하는 지문의 수준은 거의 ‘영화적’입니다. 하지만 연출가는 가급적 무대 장치를 줄이는 연극적 전략을 쓰고 있고, 그러면서도 작가의 주제의식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윤조병의<이혼연습>은 작가의 최근작으로 이른바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의 부부간 의사소통 불가능성의 문제를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성(性), 시뮬라크르(Simulacres)>라는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의 성과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원로 작가 윤조병은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헤집어 치유하려던 과거의 사실주의적 극작술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90년대 이후 소비사회 한국의 문제를 한 부부의 현실과 환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작가 스스로 지적하듯이 장면구별은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장면 구분 없이 진행되는 ‘열린 형식’의 연극이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현실과 환상, 그리고 과거 회상 장면이 지속적으로 교차됨으로써 진행과 구성의 연속성이 파괴되고 있다. 때문에 관객들은 애초에 시작-중간-결말의 ‘잘 만들어진(well-made) 연극’, 즉 익숙한 방식의 이야기 진행에 대한 기대를 말아야 한다. 더욱이 이철우/천이숙 부부의 현재, 그들 각자의 마음속 이성상인 나우희/안철수, 그들 부부가 러시아에서 만나 애정행각을 벌였던 엘레나/세르게이까지 두 배우가 도맡아 해야 한다는 극적 상황은 극의 사실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다시 말해 이철우/천이숙 부부가 1인 다역을 맡아하면서 ‘역할탈퇴’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극의 대강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천이숙의 남편이자 건축가인 40대 초반의 이철우는 낮에 자고 밤에 작업하는 야행성 인간이다. 반면 아내 천이숙은 사진작가로서 밤에 자고 낮에 작업을 하는 40대 초반 야행성이다. 이러한 상이한 생활 행태(Life-Style)는 이미 이 부부의 갈등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별거중이다. 원인은 처음 결혼할 때 서로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실체가 허상에 불과했다는 흔한 깨달음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사랑과 전쟁>같은 TV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투적 갈등이지만,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교차시키는 독특한 기법으로 멜로드라마로 전락할 위험을 비켜 간다. 이철우는 천이숙에게 청혼할 때 ‘인생의 피라미드’를 ‘걸작품’으로 쌓자고 했지만, ‘졸작품’이 되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이에 대해 천이숙은 “작품은 늘 처음 구상하고는 엉뚱하게 가요. 당신의 설계도도 나의 사진도요”라는 진단을 내리고, 이철우는 ‘가정과 예술’ 모두를 성취하려는 각자의 욕심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작품을 면밀히 읽어보면 이들의 진짜 별거 원인은 ‘시뮬라크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부부가 파경에 이르게 된 첫 번째 계기로 삽입되어 있는 러시아 여행은 별거의 빌미가 되었을지언정 진짜 원인은 아니다. 이들이 결혼을 ‘이혼연습’이라고 생각하게 된 진짜 원인은 바로 현실의 남편/아내와 상상적 연인(‘시뮬라크르’)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이다. ‘시뮬라크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은 프랑스의 포스트 모더니스트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현대 사회(‘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한 소비사회에서는 이미지가 세계를 보는 틀이 된다. 이 이미지는 현실과 무관한 가상으로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현실이 되는 것이 바로 ‘시뮬라크르’(simulacres)다. 그런데 가상이나 허상에 불과한 시뮬라크르가 현실(실재)보다 더 현실적이고 가공할 만한 힘을 구사한다는 데에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숨어 있다. “그놈의 시뮬라크르가 우릴 망쳤어요”라는 천이숙의 대사는 그러한 시뮬라크르의 권능을 말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 작품의 주제를 ‘聖 시뮬라크르’라는 구절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물론 작가 윤조병의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해가 단편적이고 정치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개념을 화두로 삼아 인물들의 갈등을 극화(劇化)한 노작가의 노력이 놀랍다. 윤조병이 이해하는 시뮬라크르는 “맞소, 과다한 기대……. 당신 이미지에 대한 내 기대, 내 이미지에 대한 당신의 기대가 너무 컸소. 그게 환상인데도 불구하고 그 환상의 크기에 우린 눌렸소”라는 이철우의 대사에 잘 나타나 있다. 작품에서 이들의 시뮬라크르는 나우희/안철수로 상징화되어 있다. 나우희와 안철수는 이철우와 천이숙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했던 연인들이지만, 이들은 각자 두뇌속의 가상적 ‘이미지’(image)에 불과하다. 이철우와 천이숙은 각자의 시뮬라크르를 통해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보면서 환멸을 키우고 급기야 별거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관념 속에서 자신의 이상적 연인들을-Jung의 표현대로라면 아니마/아니무스-만나면서 일의 영감을 얻고 비루한 일상의 정신적 상처를 다스린다. 이철우와 천이숙이 각자의 가상적 연인에 빠져들면 들수록 그들의 실제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그만큼 파국에 대한 관객의 느낌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과연 관객/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쉽지 않은 문제다.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고자 한 풍속화 같기도 하고, ‘반영웅’들을 통해 부부 사이의 정도(正道)를 가르쳐주려 한 것도 같고, 한 부부의 상징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소통의 어려움을 설파하려 한 것도 같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이러한 다의성(多意性)에 있다. 관객/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처지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작가는 우리 시대의 애정 문제를 통해 현대 사회의 인간 문제들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등장인물의 성격이 모순적이다. 물론 실재 의식의 수면에 떠오르는 인물의 태도와 욕구나 상상 속의 태도가 다른 것은 이해할만하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에서 허용치 않는 상상들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가령 천이숙/안철수, 이철우/나우희의 관계는 의식/무의식의 관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거니와, 이들의 상상적 만남은 바로 일상의 비루함을 극복할 수 있는 탈출구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철우와 천이숙의 성격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가령, 이철우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나우희에게서 삶의 에너지와 작업의 영감을 얻는다. 그는 나우희의 관능미(백치미)에 자신을 맡겨 버리고, 자유를 추구하면서 천이숙에게 ‘지긋지긋한 연습’에 불과한 결혼을 끝내자고 말한다. 그는 나우희와의 관계를 불륜으로 매도하는 천이숙에 대해 “간통이나 이혼은 비참한 처지에 놓인 부부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안철수와 관계하던(아니, 관계를 상상하던) 천이숙에게 “세상에! 인간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윤리를 복원시켜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격 묘사의 결함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천우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여성의 성적 매력에 집중하는 여성 속옷 광고의 관행을 뒤집고, “거부의 힘, 반역의 힘”을 이용하려는 전투적인 여인상으로 등장하더니, 나중에는 이철우의 불륜과 그로 인한 가정의 파탄을 맹렬히 비판하는 대목은 아무래도 인물 성격의 일관성을 저하시킨다. 실제 공연에 임할 연출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 터이다. 이 작품의 무대화는 무척 어렵다. 가령 전체적인 무대 설정을 보면, 작가는 이철우와 천이숙의 작업실, 그리고 시베리아의 횡단열차, 바이칼 호수 산장 등의 기타 공간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소극장 무대에서는 무척 어려운 설정이다. 게다가 유리벽과 돔형 지붕을 마련하여, 천장의 경우 ‘해의 이미지’의 이미지와 ‘달의 이미지’를 나타내도록 설계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역시 무리한 설정이다. 소극장 무대를 감안한다면, 무대장치를 철저하게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유리벽이니 돔형 지붕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철저하게 양식화된 무대로써 달과 해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 설계 작업실이나 암실처럼 무대를 세팅하라는 요구도 그렇고, 직접 커피를 끓이면서 그 향기가 객석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요구 등도 마찬가지다. 다만 공간에 대한 정보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고, 배우들의 연기에 필요한 소품만으로 무대를 채워 배우들의 동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외에도 작가는 영화나 대극장 무대시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장면들을 지문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소극장 공연의 경우 극 진행에 필요한 장치들만으로 극적 효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요구하는 음향이나 조명을 통해 무대의 간소함을 상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이 작품의 어려움은 잦은 춤장면과 성희 장면, 샤워나 배우의 육감적인 신체의 형상화에도 있다. 춤이야 배우들의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극복되겠지만, 성적 묘사들을 날 것 그대로 무대화할 경우 극의 주제 전달이 어려워질 것은 물론이고 단지 그러한 장면들에 대한 말초적 관심들만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극제의 주된 관객층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장면들의 처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가령 실루엣 처리라든지, 극의 환상성과 몽환성을 강조하기 위한 조명기법을 활용하는 것도 작가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관객의 적절한 반응을 자아낼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요구하는 지문들은 너무나 자세하고 친절하다. 작가는 ‘이미지 무대’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포스트모던한 분위기의 일단을 드러내고자 한다. 무대장치-음악-조명-배우들의 춤과 육체의 강조를 통한 욕망의 표현 등은 작가의 그러한 야심을 보여준다. 사실 극의 전체적 전개 과정에서 이들 하나하나는 나름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문제의 어려움은 이번 연극제가 열리는 무대 공간의 협소함과 장치의 빈약함에 있다.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는 그로토프스키(Grotowski)가 제창한 ‘가난한 무대’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좁은 무대에 온갖 소품과 장치들을 가득 채우기보다는 배우의 몸짓과 음성의 다각적 활용으로써 극장과 무대의 한계를 돌파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작가의 과도한 요구는 실제 연극 일꾼들에게는 좋은 실험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가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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