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나운규, 필름 아리랑 '

clint 2016. 12. 5. 15:06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의 무성영화 아리랑192610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지 90년이다. 한국인에 의한 영화제작은 1919년부터 시작됐으나 아리랑은 민족주의적 주제와 영화기법에서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 명작으로 꼽힌다. 감독·주연· 원작·각색까지 맡았던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한 편으로 일약 민족의 영웅이 됐다.

영화 아리랑,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19506·25 전쟁 직전까지 상영됐다는 신문·잡지의 기사나 광고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9529월 대구 만경관에서 1주일간 아리랑이 상영됐다는 기사가 당시 대구에서 발행된 영남일보에 실렸다. 6·25 전쟁 이후에도 아리랑이 상영된 것이다. 30년 가까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아리랑은 그러나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오직 당시의 영화 아리랑을 재구성한 영화소설 아리랑(박문출판사, 1929)이 한국 영화연구가 김종욱(金鍾旭)의 발굴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을 뿐이다. 극장에서 아리랑을 봤다는 이들의 증언에서 그 위상을 확인할 수 있으나 증언자 대부분이 현재 사망한 상태다.

 

 

 

흔히 나운규의 아리랑을 얘기할 때 1926년 작 아리랑을 지칭하지만, 춘사는 3편의 아리랑연작을 만들었다. 1926년 작 아리랑과 속편인 1930년 작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는 무성영화다. 1936년 작 아리랑 3은 발성영화로 제작됐다. 모두 춘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연작이다. 흥미로운 점은 2편과 3편이 개봉됐을 때도 1아리랑은 계속 상영됐고 일부 극장에서는 1편과 2, 또는 1편과 3편을 동시 상영했다는 점이다. 1아리랑이 흥행·인기·내용 면에서 2, 3편을 압도했다. 하지만 연작 1~3편 모두 필름의 행방을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작품은 나운규의 과거 영화 재작의 열정을 현재에서 되돌아보며 그와 그의 동료들을 되돌아보고 그의 아리랑 필름이 꼭 찾아지기를 기원하는 희곡이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한 장면. 개봉 당시 15만 관객이 들며 항일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영화 아리랑은 천재 영화인 나운규가 불과 24(26)때 발표했던 한국 최초의 영화이지만, 화마에 휩쓸려 이 땅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작품이다. 극은 한국 영화사의 막을 열었던 막역지우 춘사 나운규(1902~1937)와 금원 윤봉춘(1902~1975) 두 사람 간의 인생역정이다. 분방한 성격의 예술인 춘사와 견실한 제작자 금원의 관계는 그 동안 세간에서 두서없이 회자돼 왔던 터. 그러나 연극으로는 이번에 첫 조명된다.

노년의 금원에게 춘사의 혼이 찾아 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펼쳐지는 이야기다. 춘사가 금원의 품속에 안겨 비로소 안식하고, 금원은 친구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이승을 하직한다는 슬픈 줄거리다.

 

영화 아리랑39년까지 상영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1시간 50). 원본 필름은 현재 아베 오시시게(安部善重)라는 일본인이 5, 6벌 소장하고 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통일이 되면 반납하겠다』 『대통령의 공식 요청이 있으면 반환하겠다는 등의 태도로 일관해 오고 있다. 과연 갖고 있는지, 진작에 소실돼 버렸는지, 존재여부조차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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