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탄 '꽃섬'

clint 2016. 12. 5. 11:58

 

민예극장 제 84회 공연,, 제 6회 현대시(現代詩)를 위한 실험무대

 

 

줄거리
1장
어느 부둣가에 주막이 있다. 실성한 한 여인이 주모에게 남편이 돌아온다는 배를 기다린다는 넋두리를 한다. 여인은 나가고 염소를 파는 남자가 들어와 술을 청한다 주모와 수작을 하던 남자는 다시 실성한 여인이 들어와 넋두리를 하자 받아준다.
2장
잠시 후, 허리띠를 파는 남자가 들어와 허리띠를 염소 파는 남자에게 팔고만 돌아가려고 하자, 염소 파는 남자가 그에게 술동무를 청한다. 두 남자와 주모가 서로 간의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하는 도중에 실성한 여인도 끼어든다.
3장
다음 날 아침, 허리띠 파는 남자는 가상의 섬이자, 마음속의 섬인 꽃섬을 찾으러 떠나려고 하고, 염소를 파는 남자는 전날 밤에 잃어버린 염소를 찾는다. 이 때, 배가 부두에 도착하고 실성한 여인이 남편을 마중한다고 나가지만 그만 물에 빠져 죽는다. 함께 꽃섬을 찾아가자는 허리띠 파는 남자의 말에 따라 염소 파는 남자도 따라 나서려 하고 결국 주모도 따라 나선다.

 

 

 

 

시극은 글자 그대로 시와 연극을 혼연일체화시켜 무대에 올리는 것. 드라머가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시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연극이다. 시극운동은 활자에만 얽매이는 시를 연극과 연결시킴으로써 시를 보다 많은 독자와 가깝게 하여 시세계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또 연극쪽에서도 시적 상상력이 충분한 질높은 연극을 해낼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극운동은 60년대초 홍윤숙·장호씨등에 의해 시도되였으나 곧 중단되었다. 79년에 와서 시인 정진규·이근배·김후란·허영자·김종해·이탄·강우식·이건청등 8명이 「현대시를 위한 시극동인」을 만들고 그해 12월 정진규작 『빛이여,빛이여』를 허규씨의 연출로 첫 무대에 올려놓았다. 그후 강우식작 『벌거숭이의 방문』, 이근배작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던 두개의 섬』, 김후란작 『비단끈의 노래』, 이건청작 『폐항의 밤』등 5편이 81년까지 계속 공연되었다. 
국내에서 유일한 시극운동이었던 이동인들의 운동은 그후 중단 되였다가 3년만에 다시 재개된 것이다.
시극은 대사가 시자체이기도 하고 또 보통의 대사일 경우에도 시적 문체를 띠고 있다. 또 극전체로도 시적 분위기를 이루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에서 사실성보다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면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청중들은 보통의 연극에서 보다 긴장하게 되며 환상적인 세계를 맛보게 된다. 『벌거숭이의 방문』을 무대에 올렸던 강우식씨는 『시와 드라머 양쪽을 살려야하는데 시극을 쓰는 어려움을 느꼈다. 잘못하면 시도 드라머도 죽어버리기 때문이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상상력이 충동되는 새로운 세계에 청중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데 시극의 장점이 있으며 그를 통해 시인과 청중이 만나게 되는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시극 『꽃섬』은 6·25로 인해 분단된 민족의 아픔과 전쟁에 대한 고발, 그후의 혼란속에서 야기된 비뚤어진 가치관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겨내고 아름답게 살고자하는 인간심성을 그린 작품이다. 민예극장의 중진급 배우 최재영·정태화·김은희·윤광희씨등이 출연한다. (연출 정현).
정한모씨 (시인·문예진흥원장)는 『시극의 부활을 기뻐한다. 과거에 시극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시를 이해하고 있거나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연극인에 의해 연출되고 공연되는 것은 흔치않았다.
시와 연극이 이렇게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이러한 만남에 의해 연극쪽에서도 그 자체의 질적 변화에 자극되고 시의 측면에서도 시를 넓힐수 있는 활로가 개척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반씨 (극작가·숭의여전교수)는『현대시는 독자의 직감과 동시에 사고를 요구하며 시극은 그것을 위해 도옴이 된다』고 시극운동의 필요성을 말했다.

 

이탄 시인

 

작가의 글 - 이탄 시인

삶이란 무엇인가. 꽃 한송이를 따서 정대신 줄때 우리는 꽃의 생명을 꺾었다는 것을 잊는다. 다른 생명으로 표시되는 정. 꽃은 멍들지 않고 뼈가 꺾이는 아픔의 시간을 모르는 것일까. 즐비한 갈비집 앞에서 송아지의 맑고 부드러운 엄마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귀에 이상이 생긴 탓일까.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어디 한두 번 했겠는가. 그렇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해물탕 속에서 빠알갛게 익어가는 새우의 등은 우리들의 식욕에 봉사하기 위한 것인가. 푸른 바닷물만 보고 있는 것 같은 갈매기는 왜 자꾸 날갯짓하고 머리를 하강시키며 입을 벌리는가. 대나무 마디처럼 기억이 선명해지고 선명한 기억 속의 이름을 생각하며 보다나은 내일을, 햇빛 충분한 내일을, 하고 영혼의 풍성함을 보고 싶은 시간 위의 빗줄기는 왜 장마로 변하기도 하는가. 왜 빠알간 새우의 등이나 하얀 속살을 파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지글거리고 마디처럼 선명한 삶의 기억은 해물탕의 국물처럼 졸아드는가. 거기다 물을 붓고 또 거기다 물을 붓는 일처럼 시간의 경우도 그런 것일까.

삶이란 무엇인가. 흐르는 물에다 삶을 비교해 보기도 하고 흐르는 구름 한쪽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망우리 지하다방에서 검은 코트를 걸치고 만날 것이라고 익살을 부리면서도 옷의 빛깔이나 눈빛, 정의 단면을 생각하며 야속하다고 울부짖기도 한다. 야속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봄은 무엇이고 겨울은 무엇인가. 누가 이 살아있음의 갈등을 한폭의 그림처럼 찍어낼 수 있을 것인가. 왜 많이 가지려하고 왜 적게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가. 자연의 저 푸른 빛깔, 하늘의 푸르름과 빛은 누구에게나 고르고 푸짐하지 않은가. 60년이든 70년이든 지느러미 빼고 올챙이 다리 빼고 하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내가 바로 서있는 시간이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내가 사랑한 시간인가. 주었어야 그것이 얼마며 받았어야 그것이 얼마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위의 어른거리는 빛의 공간인가 아니면 부처의 눈에 담긴 삼라만상의 실체인가. 신발 문수 만큼의 사랑인가. 톱니바퀴나 피댓줄을 돌리는 손목의 크기만한 시간이 진실의 모두인가. 빌딩도 서 있고 나무도 서 있고 모든 것들은 눕기보다 먼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것 같다. 하늘로 하늘로 그러나 다시 땅으로 땅으로 그리하다가 흙속으로 흙속으로 그리하다가 바위가 되고 흙이 되고 다시 서고 다시 눕고 한다. 바람처럼 지나가고 바람처럼 다시 온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다시 온다.

비록 뼈 없는 오징어를, 말 없는 아구를, 손 없는 조개를 아니 무수한 생선의 가시를 고르고 무수한 갈비를 뜯으며 싱싱한 배추 잎을 소금으로 푹푹 절이며 내가, 나는 그러다가 우리는 무언가를 발언하지만 아직도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한 마리 짐승이다. 다만 배고플 때 먹고, 다만 졸리면 자지 않을 수 없는 한 마리 포악하지 않은 짐승이다. 그러나 짐승 중에 인간이란 짐승이라고들 하니 인간이 무엇이고 그 냄새가 어떤가를, 좋은 냄새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꽃섬은 바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다가 그것이 덜 익어서 인간다운 냄새가 무엇인가를 포장마차에 앉아 이야기하는 그런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선명한 삶의 기억을 지닌 주인공의 한 사람이 꽃섬을 발견하고 간직하려는, 평범 속의 때 묻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었다. 때 묻어 살면서도 때 묻지 않으려는 과정, 숭고함 속에서 더 밝은 태양은 떠오르리라. 영혼의 만남속에서 지상의 생활은 한순간이나마 맑고 부드러울 것이다. 맑고 부드러운 것 이상 더 강하고 큰 것이 세상에 어디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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