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석지윤 '하드보일드 멜랑콜리아'

clint 2016. 11. 4. 16:40

 

  

사회 범죄를 통해 현대사회의 징후를 읽어보는 작품 <하드보일드 멜랑콜리아>는 아내의 죽음이 연쇄살인범의 짓이라고 믿는 형사와 그의 수사를 의심하는 취조자 사이의 심리 싸움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은 범죄극을 표방한다. ‘고전적 의미의과격한 형사와 그 형사를 취조하는 취조인 두 사람의 대사를 중심으로 형사의 기억 속 사건이 각각의 장면으로 만들어져 나열된다. 범죄극의 익숙한 관습에 대한 기대와 달리 극의 전개는 장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문제는 형사의 기억이다. 실제로 자신이 수사하고 겪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속에 형사의 무의식이 교묘하게 얽혀 있어 현실과 환상이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작가의 초고에서는 연쇄 살인범을 쫓는 형사가 그 범인이 아내를 죽였다는 망상에 시달리면서 우울과 정신분열로 자살한다. 그런데 연출가와의 작업 과정에서 연쇄 살인범 자체가 형사의 환상이었고, 아내를 죽인 것도 자신임이 밝혀지면서 자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로 간 관계성이 토막 나고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도시는 그 자체로 무감(無感), 무정(無情)의 사막이자 진창인 하드보일드인데 그런 도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형사의 완고한 의식은 그가 대면하는 사건과 범인들의 극악함에 전이되어 극단의 멜랑콜리, 우울을 앓는다는 설정이 보다 강화된 것이다.

 

 

 

 

 

형사의 의식을 중심으로 현실과 환상, 시공간의 교섭은 이 작품의 중요한 장점인데 실제 공연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 구분의 불친절함 때문에 관객이 형사의 의식 세계를 함께 추적해나가기는 역부족이다. 비현실적 캐릭터 소녀는 물론 형사와 대면하는 유괴범· 학살범· 여대생· 방화범 등이 왜 형사의 멜랑콜리를 만들어내고 작동시켰는지도 모호하다. 아내는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형사와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더구나 총기 난사의 학살범과 유아 연쇄 살인범 등은 할리우드 하드보일드 영화의 단골 소재다. 그로 인해 한국 극장에서 한국 작가가 쓴 미국 형사의 이야기를 보는 듯한 이질감이 발생한다.   범죄 극이 특정 장르로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놓고 보면 이 작품의 단점은 지극히 사소한 부분이다. 조금씩 고치고 다듬으면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녹록치 않은 장르에 도전한 젊은 작가가 있다는 점이고, 그 의도를 존중하며 성실히 무대화한 연출가가 있다는 점, 그리고 지원을 결정한 시선이 있다는 점이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자양분이 되어 다양한 색채로 연극계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다. 한 가지 색이 아닌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가 황홀하게 빛나듯이 말이다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버린 창고 같은 곳, 취조실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불이 켜지지만 공간은 더욱 어두워지는 듯 하다. 모든 것을 음울하게 만드는 전등 아래에서 취조를 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형사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어두운 도시를 파헤친 그는 범인이 앉아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질문을 건네야 하는 그가 되려 묘령의 남자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셈이다.

연쇄 살인범을 찾고자 하는 형사는 변태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유괴범, 눈이 먼 시각 장애인 소녀, 학살범과 방화범 등 도시의 경계에서 어두운 죄악을 일삼는 범죄자들로부터 연쇄살인범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해 그가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12명에 대한 살인 수법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 범죄를 저지른 이가 모두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이다. 잡히지 않는 범인에 대한 수사의 끝은 알 수 없는 길로 빠져들고, 범죄를 추적하던 형사는 그 범죄에 점점 물들어 간다.

 

 

 

 

작품은 심리 스릴러 범죄극을 표방하고 있지만 방점은 범죄극보다 심리극에 맞춰져 있다. 외롭고 어두운 도시에서 범죄에 점차 물들어가는 형사의 모습을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도시의 비정함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의 우울함, 그리고 안쓰러움을 더욱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술감독인 배삼식 작가 역시 범죄수사물이라는 외피는 이 작품에 있어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고 언급했을 만큼, ‘하드보일드 멜랑콜리아는 자신이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형사가 그 패배의 길을 거닐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면서도 멜랑콜리한 정서를 석지윤 작가만의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묘미는 인물들의 정서를 대사로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력에 있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러 명이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은 마치 한 인물이 내뱉는 언어처럼 들린다는 점에서 비정하고 무정한 이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세계관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글

뉴스를 보면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하잖아요.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는 게 팍팍해지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은 현재 사람들의 심리를 읽어주는 징후가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으로도 삶은 어렵지만 거시적으로 들여다봤을 때도 삶은 역시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작품 속에 담고 싶었어요.”

사람의 정신세계에 관심이 많아요. 스릴러도 좋아하죠. 치밀한 플롯이 갖고 있는 매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스릴러라는 장르보다 인간 사회의 범죄사회학적인 원인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해요. 어떤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것을 해결하든 그렇지 못하든, 그 과정 가운데 발생하는 드라마가 궁금하거든요.”

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주지성을 갖는 사람들이라기보다, 도시라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해요. 이 작품의 경우 등장인물 각각이 거대한 도시의 회색빛 구조물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기에 불현듯 나타났다가 불현듯 사라져요. 또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선과 악의 개념도 반영되지 않았죠. 사회적인 개념에 따르면 범죄자는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제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저 한 존재죠. 저는 그 존재가 왜 그렇게 변해갔는가에 관심이 있고요. 작품을 다소 추상적으로 시작하다보니 캐스팅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캐스팅에 선뜻 손을 들어주는 배우를 만나기 쉽지 않았죠. 그런 가운데 이번 작품은 전적으로 연출님과 배우 분들에 의해 탄생했다고 볼 수 있어요. 훌륭한 배우 분들께서 훌륭하게 표현해주셔서 좋은 무대가 나올 수 있었죠.”

 

 

 

 

석지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5회 대전 창작희곡공모 우수상

2014 CJ크리에이티브마인즈 최종당선

직업: 카피라이터 및 극작가

작품 : ‘싸이코패스는 고양이를 죽인다’, ‘하드보일드 멜랑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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