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명숙 '모텔 피아노'

clint 2016. 10. 29. 17:30

 

 

 

 

 

이 작품은 초라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져 서로 아픈 곳을 할퀴며 고민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지방의 작은 도시 K. 몰락한 서울의 한 가족이 이곳으로 이사 온다. 한적한 데 자리 잡은 3층짜리 아담하고 깔끔한 모텔 피아노가 연극의 무대다. 아버지는 친척에게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린 후 큰아들이 소유한 이 모텔을 어머니와 함께 대신 돌보며 근근이 살아간다. 연극은 딸 미정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모텔의 가장 전망 좋은 방 301호엔 피아노가 놓여 있다. 지방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미정의 부탁으로 유일하게 남은 물건이다. 아버지는 바로 이 피아노에서 모텔 상호를 땄다. 그는 천박한 다른 모텔들과 달리 반드시 잠을 자고 갈 손님만 받겠다는 비현실적인 원칙을 정하고, 오는 손님들에게 전국에 하나뿐인 피아노가 있는 최고급 모텔이라느니, 딸이 피아노를 전공했다느니 하며 치졸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모텔을 찾는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중년 또는 젊은 남녀 손님들의 귀에 먹혀들 리가 없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짧게 머물며 섹스만 하고 가려는 손님들을 거절한다. 때로는 모텔의 진정한 의미와 용도에 대해 강의하다 손님들과 다투기까지 한다. 유학생이 드물었던 1960년대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아버지. 그에게 피아노는 이제 자존심이 되었다. 한때 부를 누리고 살던 시절을 대변해 주는 유물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또한 무너진 자존심을 감당해내기 힘들다. 그녀는 모텔 앞마당에 꽃밭을 가꾸며 현실을 잊은 척, 모른 척 외면한다. 웃는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고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보지만 사실 그것은 가까스로 자신을 꾹꾹 누르며 힘들게 참아내는 모습이다.

 

 

 

 

 

모텔엔 점점 손님이 줄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던 가식을 견디지 못한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물건 찍어내듯아이들을 가르치는 미정은 피아노 연주에 대한 갈망에 애를 태우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추하다고 느껴 마음껏 소리 내어 건반을 두드리지 못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모텔은 추악하다. “잠깐 쉬었다 가겠다.”는 남녀들이 찾아오고, 아버지는 러브 모텔이 아니라 정말 잠을 자는 모텔임을 누누이 강조하지만, 결국 속물근성을 드러낼 뿐이다. 미정은 언제는 거추장스러운 피아노는 팔아버리자고 했던 아버지가 모텔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띄우기 위해 피아노를 내세우는 것이 너무도 싫다. 모텔 상호를 피아노라 붙인 것 자체가 혐오스럽다. 그녀는 어릴 때 슈베르트의 노래를 함께 연주하며 부르던 엄마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러던 엄마가 터미널 부근에 붙여줘. 사람들 눈에 잘 띄게라며 자신에게 건네준 모텔 광고 전단지 한 묶음을 받아보고는 폭발하듯 소리쳐 화를 낸다. 왜 장사 안 되는지 정말 몰라? 콘돔자판기 들여놓고 포르노 팡팡 틀어주면 돼.”

서로 아픈 곳을 긁으며 속을 뒤집어놓기에 이른다.

딸은 아버지의 무능과 바보 같은 행동도 욕한다. 엄마는 결국 딸의 고교 시절 부진했던 성적과 지방대학에 그친 진학까지 꼬집는다.

나는 내 피아노가 모텔 방에 있다는 게 싫어.”

그렇다면, 네가 피나게 연습해서 저 피아노가 모텔 방이 아닌 훌륭한 무대 위에 있도록 네 꿈을 쟁취했어야지.”

어느 날 이들 앞에 사진작가 투숙객이 나타난다. 그는 다른 손님들과 달리 피아노 방에 관심을 갖고 그 방을 사용한다. 미정은 피아노여, 안녕이라는 자신도 모르는 곡을 연주하는 그에게 마음이 끌림을 느낀다. 이 투숙객은 어쩌면 현실의 억압감에 지친 미정의 상상 속 인물일 수도 있다

 

 

 

 

 

미정이 중얼댄다. “나는 왜 피아노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내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없을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왜 피아노를 그토록 치고 싶었을까요?”

어린 시절 미정에게 들려온 피아노 소리는 폭력과 허위로 가득한 아버지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현실의 고단함을 제치고 안정과 평온을 안겨주는 소리였다.

세월이 흐른 뒤, 삶 속에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미정이 아버지가 한 행동을 나름 이해하는 듯한 심정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대목은 객석에 여운을 안긴다.

 

 

 

 

 

최명숙 작가는 “‘안녕 피아노는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사춘기를 끝내지 못한 이들, 보이지만 잡을 수 없고, 들리지만 스며들지 않는 멀고 먼 이상향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이들, 안으로, 안으로 늘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이들을 위한 노래임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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