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브레히트 '예스맨 노맨'

clint 2016. 6. 16. 15:22

 

 

 

 

 

 

병든 어머니에게 ‘산 너머 도시에 사는 위대한 의사들로부터’ 약을 구해오기 위해 소년은 선생 일행의 ‘학술 여행’에 합류한다. 도중에 병에 걸리자 소년은 ‘옛 관습’에 따라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 뒤 골짜기에 내던져져 죽는다.
소년의 죽음을 위대한 순교로 해석한 종교계의 반응과 “관습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는 어느 학생이 지적이 있자,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개작, 2부로 이루어진 「예, 아니요」를 썼다. 1부에서 소년은 ‘전염병’ 퇴치를 위한 ‘구조원정’에 합류하며, 자신으로 인해 여행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상황을 시인하여 ‘관습’이 아닌 ‘필연성’에 따라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2부에서는 다시금 ‘학술여행’이 문제되며 전염병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이제 소년은 관습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번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전래의 규범 대신 오히려 ‘새로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새로 생각해 보는’, ‘합리성’에 근거한 새 관습을 즉시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분석.
작가의 발전 과정 가운데 중기에 주로 씌어진 교육극 (Lehrstu"ck)들은 작가 자신과 연기자들의 자기 확인을 위한 시도였다. 이 극작품들은 관객보다 연기자들이 중시되는, 연극의 ‘소비자를 위한 예술이라기보다 생산자를 위한 예술’이었다. 작가는 생산자인 연기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적․집단적 행동방식의 연습을 통해 구체적인 사회 상황에 적응할 자세 및 행동의 소인을 몸에 익히게 할 것을 교육극의목표로 삼았다.
「동의에 관한 바덴의 교육극」에 이어 완성된「예스 맨」은 일본의 노극「다니꼬 Taniko」의 영어판을 근거로 하는 ‘학교 가극 Schuloper'이다.「다니꼬」는 어느 소년이 수도승들의 여행에 동행, 도중에 병에 걸리자 골짜기에 내던져져 죽지만 후에 부처에 자비로 환생한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이용한 아더 웨일리 (Arthur Waley)의 번역본은 소년이 죽는 장면까지만 취급했고, 이에 따라「예스 맨」도 일본의 원본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브레히트는 사회혁명과 관련하여 “올바른 동의를 배워야 한다”는 교육 목표에 따라「예, 아니요」의 두 부분이 함께 공연될 것을 요구했다. 비록 학교와 아마추어 극단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1930 - 1932년 사이에 48회, 1945년 이후 서독에서만 80회 이상 공연되었다. 이러한 높은 관심도는 아마도 교육극이 목표하는 ‘동의’의 정치적 목표, 즉 사회주의 집단 내에서의 개인의 행동방식을 연습시킨다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2부에서 부각된 ‘합리성’의 원칙이 시대를 초월하는 호소력을 지닌 데 기인할 것이다.
브레히트 학습극 세미나는 배우를 위한 연기론 및 훈련과정이다. 그는 배우에게 단순한 볼거리와 감동을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요구했다.
“원숭이나 앵무새가 되지말라”던 브레히트의 연기훈련은 배우들이 매일 신문을 읽고 서로 토론하면서 연습을 시작하곤 했다.
“브레히트는 배우에게 연기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가 지금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곤 했다. 그 점에서 그는 연출가라기보다 좋은 교사였다”-레기네 루츠(브레히트 생존 당시 베를린 앙상블 배우)
브레히트 극에서 연기는 세상과 연극 사이에 배우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 가로부터 출발한다. 무대 위의 제스처는 개인적 감성의 표현이라기보다 사회적 전형으로서의 함축적 의미를 지니기를 바랬으며, 이러한 게스투스를 찾아내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브레히트의 학습극은 배우가 단순한 볼거리나 감동을 제공하는 이상의 역할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장르인 것이다.

 

 

 

예스맨과 노맨의 상황에서 사회적관습이 존재한다고 할 때 예스맨은 관습이 비교적 합리적인 것으로, 노맨은 비교적 불합리한 것으로 나타난다. 브레히트가 연극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관습은 합리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하여야 하며 더나아가 사회에서 필요한 개인은 합리적판단이 용이한 개인이며 개인과 집단의 관계가 모순될 때의 판단의 바탕은 합리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합리적이라는 것의 가치판단은 대개의 경우가 집단내의 공유되고 있는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개인을 억누를 때 ‘아니오’를 외치는 것이 정당성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연극에서 예스맨의 경우 ‘어머니’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의 경계에 있었다. 어머니를 위한 아들의 희생은 연극에서 공유되는 관습이다.
 
 
 
 

 
<예스맨의 상황에서 관습에 대한 태도>
개인/집단 no/no
관습이 상당히 합리적인 상황에서 관습의 당사자인 개인과 관습의 집행자인 집단이 모두 그것을 거부했을 때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대학생과 교수집단이 원래 사회로 부터 주변화되거나 새로운 관습의 탄생이 야기될수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집단 no/yes
관습이 사회의 법칙이며 그 관습이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집단은 관습의 집행자로 작용한다.
이때 개인이 집단의 집행에 반대한다면 개인은 사회로 부터 격리되거나 집단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관습이 집행되거나
또다른 제제가 가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개인/집단 yes/no
당사자인 개인은 관습을 용인하지만 관습의 집행자인 집단은 관습을 거부한 것으로 결과는 개인이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또한 관습의 집행자가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관습은 사회적으로 시정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으로 혼 란 이 발생할 가능성 또한 높다
<노맨의 상황에서 관습에 대한 태도>
개인/집단 yes/yes
관습이 불합리한 상황에서 개인과 집단이 모두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사회적으로 선의의 피해자가 계속 발생할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옳지못한 관습에 대해서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관습은 합리성과 관련없이 계속 유지될 것이며 결국은 사회유지에 방해가 되는 관습으로 존속될 것이다.
개인/집단 no/yes
관습이 집단의 목소리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목소리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사회전체적으로도 옳고 개인으로서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관습의 집행자가 그 관습에 찬성할 때 비교적 약자인 개인은 그것에 거부할 힘을 갖긴 어려울 것이고 소년은 집단에 의해 관습에 따른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개인/집단 yes/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