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텅 빈 무대, 남자가의자에 앉아 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남자는 무표정하게
마치 컴퓨터 언어 같은 명령어를 내뱉는다: "File. Open. Innocence."
조명이 바뀌면서 소년(BOY)과 소녀(GIRL)가 무대에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 장난을
치고 웃으며 첫사랑의 순수하고 풋풋한 감정을 나눈다. 소녀가 소년의 얼굴을 만지다
순간 멈칫하는 등 미세한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이내 입맞춤하며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그 순간, 관찰자였던 남자가 다시 개입한다: "File. Stop. Replay." 조명이 깜빡이고 소년과
소녀는 방금 전 나누었던 대화와 스킨십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하지만 처음처럼
순수하지 않다. 똑같은 대사 속에서도 소년의 어조에는 미묘한 의심과 불신이 섞이기
시작한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을 비웃는 건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으며 집착의 전조를 보인다. 극이 진행될수록 소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질투와
열등감이 폭발한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둔 사이이지만, 소년은 소녀의 과거를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한다. 소년은 소녀가 과거에 만났던 다른 남성들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소녀는 "그건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며, 현재의 나를 사랑해달라"고 애원하지만, 소년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냐"며 타인의 시선과 질투에 눈이 멀어 괴로워한다.
소년의 추궁에 결국 소녀도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날카롭게 맞서며, 두 사람의 대화는
순식간에 서로를 상처 입히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한다. 순수했던 사랑이 의심으로 인해
완전히 오염되는 순간이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감정의 폭발이 최고조에 달해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 의자에 앉아 모든 것을 지켜보던남자가 다시 명령을
내린다: "Close file." 그의 통제에 따라 소년과 소녀의 격렬했던 다툼은 한순간에 멈추고,
두 사람은 다시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거나 무대 뒤로 사라진다.
남자는 차갑게 무대를 정리하며 막이 내린다.

월터 와이크스의 <오염된 사랑>(Tainted Love)는 통제, 불신, 인간관계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심리극 형태의 단막극이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미래지향적
이거나 실험적인 연극제 등에서 자주 상연된다.
이 작품은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주문 혹은 컴퓨터 명령어 같은 대사를 뱉으며 시작된다.
그의 통제 아래 소년과 소녀의 기억 혹은 시뮬레이션 같은 장면이 재생된다.
소년과 소녀는 겉보기에 풋풋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소년의 마음속에 내재된 깊은 불신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분위기가 급변한다. 소년은 소녀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그녀의 과거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극중 인물들은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서로를 향한 의심 때문에 관계는 서서히 오염되어 간다. 무대 위의 'MAN'은
이들의 대화와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거나 파국으로 치달을 때 개입하여 상황을 종료시킨다.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아니다. MAN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기억'이나 '특정 감정(집착/질투)'이 어떻게 뇌에서 반복 재생되고 스스로를 갉아먹는지를
시각화한 메타 연극입니다. 소년의 의심 때문에 아름다웠던 기억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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