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소설 225

이청준 '서편제'

는 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이하는 소리꾼과 그의 딸 이야기에서 소리에만 미쳐 살아가는 소리꾼이 그 딸 또한 소리장이로 묶어두기 위해서 두 눈을 멀게 하는 끔찍한 장면을 통해 조성된다. 딸이 잠자는 사이 두 눈에 청강수를 넣은 것인데, 그렇게 하면 눈으로 뻗칠 사람의 영기가 귀와 목청 쪽으로 옮겨가 목소리가 비상해진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위해 일부러 눈을 멀게 한다! 여기에 사람의 눈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지는 소리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소리에 대한 우리의 전면적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청준이 즐겨 사용하는 소설구성, 즉 소설의 작중화자와 주인공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방법을 통해서 진술되고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적한 길목 주막이 소릿재 주막이라는..

좋아하는 소설 2023.03.24

테드 창 '영으로 나누면'

1=2 1은 2와 같다는 증명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증명은 a=1, b=1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a=2a로 끝난다. 이 증명의 중간에 눈에 안 띄게 숨어있는 게 있는데 바로 0으로 나누기이다. 0으로 나누는 것을 인정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두 수도 같다고 증명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문단이 특이하다. 1, 1a, 1b / 2, 2a, 2b ~9, 9a, 9b까지 그러니까 내용에 따라 27개가 3개의 묶음으로 되어있고, 숫자만 있는 가장 먼저 나오는 문단은 수학적 증명이 기술되어 있다. 르네는 수학 교수다. 처음 장면은 르네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는 모습. 사실 그녀의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지만 퇴원하기 위해 의사를 속였다. 그녀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1이 2와 같다는 증명을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

좋아하는 소설 2023.03.22

정명섭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한때 한양에서 가장 잘나가는 외지부였다가 몰락해 선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주찬학에게 어느 날 전라도의 외딴섬 하의도 주민 윤민수와 두 사내가 찾아온다. 백 년 전 정명공주와 혼인한 풍천 홍씨 집안의 토지수탈과 억압이 극에 달해 왕실을 제소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 이에 주찬학은 왕실과 겨룬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주찬학은 내심 이번 소송을 기회로 재기에 성공해 ‘한양 최고의 외지부’라는 왕년의 명성을 되찾고 싶은 욕망도 슬그머니 꿈틀거리지만 섣불리 나설 용기를 내지 못한다. 나랏법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소지(소장)를 접수조차 해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이대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위기에 처한 하의도 주민들을 본 주찬학은 결국 마음을 바꿔 소송대리인이 되기..

좋아하는 소설 2023.03.21

테드 창 '지옥은 신의 부재'

태어날 때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었던 닐은 어느 날 천사의 강림으로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었다. 평범하게 신을 믿지 않고 살면서 평범하게 스스로 지옥에 갈거라고 믿었던 닐은 신을 믿고 천국으로 간 아내를 만나기 위해 신을 사랑해야만 하게 되었다. 아내를 만나기 위해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 수 없는 신을 사랑할 방법을 고민하다,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점점 확신해가던 닐은, 천사 강림 때 나타나는 천국의 빛을 보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닐은 천국의 빛을 볼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천사가 주기적으로 강림하는 성지로 향한다. 묘사되는 시대가 현대와 다를 바 없고 천국과 지옥 이야기라서 어디가 SF인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좋아하는 소설 2023.03.20

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2010년에 발표하고 국내에는 2013년에 출간된 테드 창의 중편 SF 소설. 역시 테드 창 답게 휴고상, 로커스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로 테드 창이 발표한 작품 중 현재까지 가장 긴 작품이다. 데이터어스라는 가상 세계에서 유저들이 키우는 가상의 애완동물 '디지언트'를 소재로, 디지언트를 키우는 애나와 데릭, 그들의 디지언트인 잭스, 마르코, 폴로를 중심으로 십수 년에 걸친 육성 이야기를 보여준다. 전직 동물 조련사인 애나가 블루감마 사에 취직하고 디지언트들의 육성을 맡는다. 디지언트를 키우며 점점 애정이 늘어나고 로봇단말에 탑재하는 등 새로운 기술 덕분에 더더욱 친근해지지만 IT업계의 냉혹한 현실 덕분에 회사들이 망했다 흥했다 하고 디지언트들은 이에 휘말려 끊임없이 존속의 위협을 받는다. 이 소설에 있어..

좋아하는 소설 2023.03.19

테드 창 '일흔두 글자'

로버트 스트래튼은 물체에 이름을 붙여 '자동인형'을 만들어내는 명명학을 연구한다. 이 자동인형은 어느 이름이 붙여지는지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름을 붙이면, 물건을 운반하는 등 인간을 도와주는 자동인형을 만들 수 있다. 스트래튼은 어느 날 인간처럼 손가락을 기민하게 움직이는 자동인형의 이름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면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기에, 인간들이 고된 노동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가장 먼저 자동인형을 제작하는 마스터 윌러비를 찾아가서, 자동인형을 주조하는 작업을, 그가 만들어낸 이름으로 대체하기를 설득한다. 하지만 마스터는 주조작업은 고도의 기술이며 인간 고유의 직업이기 때문에, 스트래튼이 만든 이름이 그들의 직업을 빼앗을 ..

좋아하는 소설 2023.03.15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잠들면 나타나는 비밀 상점. 그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잠들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상점가 마을. 그곳에는 잠든 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이 즐비하다. 잠이 솔솔 오도록 도와주는 주전부리를 파는 푸드트럭, 옷을 훌렁훌렁 벗고 자는 손님들에게 정신없이 가운을 입혀주는 투덜이 녹틸루카들, 후미진 골목 끝에서 악몽을 만드는 막심의 제작소, 만년 설산의 오두막에서 1년에 딱 한 번 상점가로 내려온다는 베일에 싸인 꿈 제작자, 태몽을 만드는 전설의 꿈 제작자 아가냅 코코, 하늘을 나는 꿈을 만드는 레프라혼 요정들의 시끌벅적 작업실 등…. 하지만 잠든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온갖 꿈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상점가! 이 골목은 긴 잠을 자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짧은 낮잠을 ..

좋아하는 소설 2023.03.14

기욤 뮈소 '당신 없는 나는'

여주인공 가브리엘의 인생에는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대학시절 첫사랑, 지금은 사명감 높은 경찰아다, 다른 남자는 아버지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신출귀몰하는 세계 최고의 도둑이란 걸 알게 된다. 오래 전 가브리엘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남기고 떠난 두 남자. 그들이 한 날, 한 시에 나타나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 흔든다. 이미 오랫동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여온 두 남자는 최후의 승부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에서 마주한다. 두 남자를 모두 지켜주고 싶지만 그들은 죽음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은 버클리대학생 가브리엘과 소르본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사회의 안팎을 두루 경험하고자 샌프란시스코를 두 달 간의 일정으로 방문..

좋아하는 소설 2023.03.12

마르크 레비 '고스트 인 러브'

곧 연주회를 앞두고 있는 파리의 피아니스트 토마는 아버지의 사망 5주기를 맞아 어머니의 집에 방문한다. 고독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지만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또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토마. 연주회 리허설을 마친 후 기진맥진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 아버지의 서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절초풍하는 토마 앞에 나타난 아버지 레몽의 유령은 태연히 아들 토마에게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왔다고 얘기한다. 바로 첫눈에 반해 평생 사랑했던 카미유와의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서 토마는 유령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고, 결국 이 유령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고스트 인 러브』는 마르크 레비의 기념비적인 스무 번째..

좋아하는 소설 2023.03.10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살아가는 데 있어 예술의 문제란 어쩌면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에 나오는 스트릭랜드같은 사람에게 있어 예술이란 인생 전체의 문제이고 포괄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예술이란 사실 보고 즐기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무 의미없는 유희나 유한 취미로나 보일지도 모른다. 당장의 생활이 급급할 때, 문학이니 음악이니 미술이니 하는 것들을 누가 감히 들먹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 치열하고 복잡하고 신산스러운 삶에 비해 예술은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 예술에 대한 불꽃같은 정열을 지니면서도 냉소적이리만치 삶을 경시한 한 사나이의 초상이 있다. 그는 온갖 육체적 악조건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만 살다가, 죽음 또한 예술과 함께 했다. 자..

좋아하는 소설 2023.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