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 62

필리프 반멘베르크 '미켈란젤로의 복수'

이 작품을 훑어보기 위해 손에 잡은 지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다 읽기 전에는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이야기가 재미있다. 어디 줄거리의 재미뿐이랴. 그 시간 내내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천장화 사진을 눈앞에 펼쳐놓고 그 옆에 다시 천장화 안내지도를 참조하면서 그림을 샅샅이 훑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쾌감이 줄거리의 재미 못지않게 짜릿하였다. 괴물 같은 천재 미켈란젤로의 행적을 바티칸 문서고 깊숙한 곳에서 문서를 통해 추적하는 과정이 감성과 지성의 굵은 줄기부터 말초부분까지 구석구석 자극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부분적으로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가 구분하기 힘들 만큼 긴밀하게 짜여있다.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 지적 중심축은 기독교와 ..

좋아하는 소설 2023.07.22

박동화 '등잔불'

1978년 박동화(1911-1978)의 유작으로 알려진 등잔불(7장)은 제목이 주는 선입관이 고전적 이미지이나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대결을 다룬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이상한 차림을 한 사탄의 족속들이 양심을 팔라고 외치며 거리를 횡행한다. 인간이 어느때부터 존재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하면서부터 사람의 양심을 사고파는 행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권력에 양심을 팔고 금력에 양심을 팔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팔고 사는 행위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도 주야를 헤아리지 않고 양심매매가 성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헤아리면서도 자기의 양심을 지키는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은 동서양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인간이 만물의..

한국희곡 2023.07.22

허만 멜빌 '모비 딕'(Moby Dick)

이 소설의 화자인 이슈마엘은 무료한 학교선생 생활에 싫증을 내고 어느 날 맨해튼을 떠나 포경선에 오른다. 뉴베드포드에 온 그는 그날 여관방이 부족하여 남태평양 출신의 작살잡이 퀴케그와 방을 함께 쓴다.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퀴케그는 야만스런 외모와는 달리 친근한 사람으로 둘은 친구가 되어 같은 포경선 피쿼드 호에 오르기로 한다. 항해가 시작된 후 여러 날 동안 선장은 나타나지 않고 포경선은 두 항해사 스타벅과 스터브가 조종한다. 어느 날 배가 남쪽으로 갈 때 에이합 선장이 갑판에 나타난다. 선장의 한쪽 다리는 고래의 턱뼈로 만든 의족이고 얼굴 한쪽의 심한 상처는 옷깃 속으로 이어져 마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상처가 이어진 듯 보인다. 배는 고래떼를 찾아 계속 남쪽으로 내려간다. 선장은 선원들을 갑판에 모..

좋아하는 소설 2023.07.21

이효석 '역사'

1939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기로 했고, 머지않아 잡지들마저 폐간될 운명이었다. `문장`은 가람 이병기와 이태준, 정지용이 주도한 한국어 문학의 심장과도 같은 잡지였다. 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이효석은 `역사`라는 이름의 희곡 한 편을 발표한다. 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희곡은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들의 운명에 대한 천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효석은 시공간적으로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예수의 시대로 독자들을 이끈다. 바야흐로 예수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 마리아와 마르다, 나중에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유다 그리고 마리아를 사랑하는 토마스 등이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가난한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를..

한국희곡 2023.07.21

홍사용 '흰 젖'

홍사용의 은 한국근대문학사에서 ‘歷史劇’이라는 용어를 타이틀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이다. (1928년 발표) 이 같은 이력에도 불구하고 은 그간 연구사에서 외면된 텍스트나 다름없었다. 홍사용에 관한 작가론 연구의 한 장면에서, 혹은 불교극 논의에서 단편적으로 거론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광수의 역사소설 『異次頓의 死』와의 비교를 통해 이 한국희곡사에서 자리하는 위치를 볼때 이 한국 근대희곡사, 특히 1920년대 희곡사에서 차지하는 독보적 위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극이라는 타이틀 당당히 내건 최초의 작품, 해당 시기까지 발표된 희곡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스케일의 장막극, 사료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이해에 근거한 서사적 재현, 음악적 효과의 과감한 활용과 시적인 대사로 대표되는 다채로운 형식미..

한국희곡 2023.07.21

데니스 켈리 '러브 앤 머니'

‘러브 앤 머니’는 사람과 사랑보다 돈이 중요해진 물질만능시대에 돈에 구속된 사람들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극의 중심에는 결혼 2년 차 신혼부부인 남편 데이비드와 아내 제스가 있다. 쇼핑 중독에 걸려 수많은 빚을 떠안게 된 제스 때문에 데이비드는 핸드폰 영업사원 일에 뛰어든다. 자존심을 구기고 옛 애인에게 찾아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떠맡게 된 데이비드는 현실 앞에 절망하지만, 돈을 얻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비용이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느 날, 꿈에 그리던 ‘드림 카’ 아우디를 시승한 뒤 벅찬 가슴으로 집에 돌아온 데이비드는 자살을 시도한 채 쓰러져있는 제스를 발견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내를 본 데이비드의 머릿속에는 ‘살려야겠다’는 다급함보다 ‘빚을 청산할 수 있겠다’는 욕망부..

외국희곡 2023.07.21

마이크 케니 '에스메의 여름'

어떤 것들은 그대로이고 어떤 것들은 달라지는 여름 에스메는 걸음마를 하고 말을 시작할 때도 매번 바닷가에 사는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갔다. 드디어 여름방학 마지막 주, 에스메는 혼자서 기차를 타고 갈 정도로 자랐다. 이번 여름에도 스탠 할아버지는 기차역에서 손녀 에스메를 기다린다. 할아버지의 집은 벽난로 선반 위 사진, 습기의 냄새,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 곰돌이 베니도 여전히 그대로다. 하지만 에스메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모자와 안경, 요리책을 두고 어디도 간 적이 없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에스메와 할아버지는 바닷가를 산책하고, 요리를 하거나 놀이공원에 가는 등 여름날의 추억을 쌓아 가지만 할머니가 없어 뭔가 아쉽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서커스 곡예사가 되어 떠났다고 하시는데... ..

외국희곡 2023.07.19

박동화 '망자석'

어느 바닷가 외따로 떨어진 한적한 마을 산허리에 열자 높이의 바위가 있었으니 옛날 이곳 사람들은 망부석이라고 했다. 결혼을 갓 올리고 난 어느 젊은 남편이 그 업이 고기잡이인지라 신혼의 단꿈도 깰 사이 없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의 젊은 아내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신령님께 축수하며 매일같이 이 바위에 올라가 축수했으나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망부석이라 했다. 그런데 이 망부석이 망자석으로 다시 불리워졌으니 어느 늙은 부부가 집 나간 아들을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년을 매일같이 이 바위에 올라가서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그 아들은 늙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이 얘기가 먼훗날 세상에 알려져 망부석이던 이 바위가 망자석으로 그 이름이 ..

한국희곡 2023.07.19

이양구 '핼리혜성'

고향은 완전히 물 속에 가라앉았다. 마을 어귀를 늠름히 지켜주던 느티나무, 고개 너머의 초등학교, 물수제비를 뜨고 다슬기를 건져올리던 실개천, 산등성이를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이던 진달래꽃…. 모두 사라졌다. 어린 시절 동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연극 은 그렇게, 눈부시지만 슬픈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1986년에 지구를 지나간 핼리 혜성처럼, 76년을 기다려야 다시 지구를 찾아오는 그 별처럼,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원형질’에 대한 아픈 회고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그 줄거리를 과거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가난하기 그지없는 산속 마을의 한 가족. 4남매 중 맏형인 혁준은 19살이고, 막내인 혁택은 12살이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한국희곡 2023.07.19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작 김상열 번안 '커피속의 일곱 얼굴'

1831년 4월 21일 브레멘에서 공개 처형된 게쉐 고트프리트는 몇 년에 걸쳐 두 명의 남편과 두 아이, 아버지, 어머니, 형제와 친구들을 포함한 15명을 쥐약으로 독살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연극대본으로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던 파스빈더는 범죄 자체보다는 게쉐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동기에 초점을 맞춰, 19세기 전반 극도로 억압적인 사회, 남성중심사회에서 탈출하고 자아를 실현하기위해 사랑과 자유를 얻고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 범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비극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극단 프라이에 뷔네에서 1978. 6월 장소 : 3.1로 창고극장에서 공연(한국초연)한 작품으로 김상열이 번안했다. 제목도 로 바꿨고, 등장인물도 주인공 미란을 비롯해 둘째 남편 동수, 친구 자영..

외국희곡 202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