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완전히 물 속에 가라앉았다.
마을 어귀를 늠름히 지켜주던 느티나무,
고개 너머의 초등학교, 물수제비를 뜨고 다슬기를 건져올리던 실개천,
산등성이를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이던 진달래꽃…. 모두 사라졌다.
어린 시절 동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연극 <핼리혜성>은 그렇게, 눈부시지만 슬픈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1986년에 지구를 지나간 핼리 혜성처럼, 76년을 기다려야 다시 지구를 찾아오는 그 별처럼,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원형질’에 대한 아픈 회고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그 줄거리를 과거부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가난하기 그지없는 산속 마을의 한 가족. 4남매 중 맏형인 혁준은 19살이고, 막내인 혁택은 12살이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 아직은 어린 장남 혁준에게 '아버지가 없으면 네가 아버지'라며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을 다짐받는다. 지나고 보니 그게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셈이다. 천성이 착하고 고운 데다가 낙천적이기까지 한 혁준은 공부를 마치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야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좋아 안 하지만 1등만 하는 똑똑한 우리 막내 혁택은 노벨상감'이라며 막내를 위해서라도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겠다고 서울로 향한다. 사실, 자식들 키우느라 고단하기 이를 데 없던 어머니의 그 만류라는 건, 당위일 뿐 진심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어머니의 진심을 혁준은 알아차렸던 거다. 혁준의 첫 일터는 신세계 백화점. 새로운 세상을 쥐어줄 것 같다는 기대감만으로도 혁준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일당 8천원으로 서울 살이를 시작한 혁택은 특유의 근면함과 낙천성으로 나름의 성공을 거머쥐게 되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자기 사업을 일으키고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와 형제들을 자신의 처마 아래로 불러모은다. 그에게는 예쁜 딸 명주도 생겼다. 하지만 이 신기루 같은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만에 그는 빚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집도 넘어가고 가족들의 생활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어머니는 암으로 투병 중이며 두세 달 정도라고 선고를 받은 상태.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던 혁준은 이제 어머니의 보험금을 노리며 어머니가 빨리 떠나시기를 바라는 후레자식이 되어있다. 며칠에 한번씩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와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가족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던 혁준은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가족들과 연락이 안되게 되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이혼한 혁준의 전처는 재혼해서 살고 있지만 딸 명주를 돌보지 는 못했고, 딸 명주는 술집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딸의 불행한 모습을 우연히 알게 된 혁준은 딸을 찾아와 아비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지금이라도 네 인생을 바꿔보라 애원하지만 아버지에게 완전히 마음이 닫힌 명주는 혁준을 아저씨라 부르며 외면한다. 그를 지탱하던 마지막 끈이 어디서 끊겼는지..... 그는 동생 혁택과 마지막 통화를 하고, 이제는 물 속에 잠긴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을 찾아 그곳으로 돌아간다. 형과 아버지의 자살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혁택과 명주. 마지막 순간 그를 내친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세상을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마음이 복잡해진 명주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지막 장소로 선택한 그곳에 가보기를 원했고 조카의 청을 들어주기로 한 혁택은 안내자를 자처한다. 그 지점이 바로 이 연극의 시작이다.
연극의 배경은 제천댐 수몰지구. 연극은 삼촌 혁택과 조카 명주가 수몰된 고향땅을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삼촌이 고향에서의 추억과 아픔을 조카 앞에서 회상하는 한나절의 여정이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영주야 이 아래가 온통 마을이었어. 여기가 순덕이네 집 앞길쯤 될 거야.
우리 마을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였지. 저기는 민용이네 밭, 저기는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도랑이 있었고….”
이어서 시계바늘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정놀이, 술래잡기, 강가에서 동무들과 고기잡기, 사소한 일로 엄마와 입씨름하기 등이 코러스들의 유머러스한 몸연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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