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위기훈 '노량격전'

clint 2023. 7. 15. 16:15

 

<노량격전>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여느 작품과는 달리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이 아니다. 충무공이 주변부로 물러난 노량해전이라니.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마지막 말씀은 어떻게 하려고? 사실 이 작품의 출발은 바로 여기부터다.  이렇게 실감나는 대사를 적은 사람은 실제로 이순신 장군의 배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꾸며낸 것인가? 전쟁과 영웅을 역사적으로 기술하면서 왜곡되거나 감춘 것이 있는지, 혹은 가공으로 꾸며서 뭔가를 가린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결국 이순신은 빌미일 뿐, 역사를 서술하는 시각의 편향성과 왜곡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역사서술'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이 작품은 위기훈 작가의 다른 역사극과는 달리 현재와 과거가 교차된다. 현재는 역사교과서 편찬과 검증을 위해 역사교육 교수와 박사가 노량해전 서술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고, 과거는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장군들이 전쟁에 임하기 전 맞닥뜨린 고민과 그 결과의 실천을 보여준다. 이 사이에 선조는 왕의 권력을 앞세워 정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평가와 상벌을 지시함으로써 전쟁을 직접 마주하는 이들의 절박함과 진정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역사서술에서 우리 민족의 주체성과 자부심을 강조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들을 삭제한다는 명분과 논리가 궁극적으로는 역사왜곡과 은폐에 해당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영웅과 전쟁중심으로 기술된 역사는 수많은 목소리와 다양한 배경을 지워버리는 폭력에 이를 수 있다는 작가의식이 돋보인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장군들이 주목받게 되었고, 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더 절실히 다가왔다. 충무공의 부하 이영남, 방덕룡, 이언량, 고득장 장군 등의 장렬한 죽음, 그리고 뒤이어 '우리의 죽음을 알려 더욱 혹독하게 왜군을 섬멸하라!"는 이영남의 대사는 죽음을 은폐한 이순신 장군 관련 역사서술과는 대조적이다. 영웅은 죽음을 은폐함으로써 더욱 더 영웅성을 강조하게 되지만 영웅 밑에 가려져 있던 인물들은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노량 해전에 대한 국제정세와 권력의 역학관계라는 총체적 상황을 전제했을 때, 퍼즐이 맞춰지듯, 인물들의 상황이 일말의 꾸밈도 없이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자행되는 역사왜곡에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 면서도 우리 또한 우리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닌지 찬찬히 돌아보자는 작가의 문제제기가 <노량격전>을 통해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실루엣만으로도 충분히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새로이 발견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노량해전 장면

 

작가의 글 - 위기훈

극작을 업으로 한다면 대부분 역사극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을 것이다. 몇 편 창작하고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빚으로, 나 역시 그러하다. 역사극은 역사와 문학, 두 가지 모두에 개입하여 일종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러나 친일사대주의로 역사의 극렬한 왜곡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를 문학으로 가두기에 나는 아직 허약하다.

이순신 장군은 국가적 영웅이다. 허나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대한 과거 정부 속내엔 숨겨진 저의가 있다. 군인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고 선조라는 왕보다 강한 장군 이순신을 영웅화 하여 독재를 합리화한 의도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 역시 그 범주 안에서 이익을 추구했고 지금도 이 '누군가들은 거대한 카르텔로 우리 사회 전반에 포진되어 있다. 생각하면 몹시 두려운 일이다.

희곡 「노량격전」은 노량해전을 소재 삼아, 한때 문제가 되었던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을 조준하고 있다.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는 3인의 지식인이 임진왜란 수록방식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그 사이사이에 임진왜란 당시 몇 장면이 펼쳐진다. 일반적으로 서사는 관찰된 구체적인 이야기에 관객들이 감흥을 얻고, 그 사이에 어떤 주제를 유추하기에 귀납적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를 서사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 틀렸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굳이 따지자면 연역적 구조에 가깝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 또한 다양한 시선이 제시되는데, 이런 성질은 토론형식을 빌리므로 이 희곡은 토론극이라 할 수 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역사에 대한 어떤 해석과 그 관점을 역으로 증명하기도 어렵고, 이를 가르친 스승을 부정하는 것도, 또 모두가 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은 계승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세력이 명분으로 삼은 축적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역사와 정치적 명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세력들은 거대한 마천루 건설에 매진하고, 그 그림자에 깔려 힘없는 사람은 교묘한 폭압에 안정감까지 느낄지 모른다.

역사 왜곡은 악이다. 왜곡을 검증하고 자각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이 담보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각은 끝없는 질문에서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창작에 임했다. '노량해전' '노량격전'으로 읽어, 은폐되고 왜곡된 임진왜란의 관점을 우선 흔드는 것이 숨은 시대적 영웅들을 재조명하는데 디딤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위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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