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동화 '망자석'

clint 2023. 7. 19. 12:49

 

어느 바닷가 외따로 떨어진 한적한 마을 산허리에 열자

높이의 바위가 있었으니 옛날 이곳 사람들은 망부석이라고 했다.

결혼을 올리고 어느 젊은 남편이 업이 고기잡이인지라

신혼의 단꿈도 사이 없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의 젊은 아내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신령님께 축수하며

매일같이 바위에 올라가 축수했으나 남편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은 바위를 망부석이라 했다.

그런데 망부석이 망자석으로 다시 불리워졌으니

어느 늙은 부부가 나간 아들을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년을 매일같이 바위에 올라가서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들은 늙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얘기가 먼훗날 세상에 알려져 망부석이던 바위가

망자석으로 이름이 바뀌어졌다.

 

박동화
전북 연극계의 거장이었던 가인(佳人) 박동화(1911∼1978). 우리 나라 최초의 신파극이 공연된 1911년 4월21일 전남 영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목포 영흥학교에서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을 보낸 후 서울로 유학생활을 떠났다. 이때 불교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시인 서정주, 연극인 서항석, 이광래 등과 활발하게 교유하면서 연극에 눈을 떴다.
1931년 학교를 졸업한 후 ‘극예술연구회’등에서 신극운동을 벌인 그는 1940년대에 들어서도 이광래와 함께 ‘중앙무대’를 창단, 자신의 희곡 ‘황금광상곡’등 많은 작품을 무대화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1942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혹독한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후 신의주에서 3년간 도피생활을 한 그는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시민극단’을 창단, 연극활동을 재개했지만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갈등하다 형의 권유로 ‘군산민보’편집국장을 맡으며 전북과 첫 인연을 맺었다. 6·25때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 1956년 전북대신문 편집국장으로 오게 되면서 전주(중노송동)에서 여섯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자 중견 연극인으로서 또다른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1959년 국립극장 현상공모에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공식 데뷔작)’가 당선된 이후부터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여운(62년)’, ‘상실(63년)’, ‘이유있다(71년)’, ‘공(孔)사장(73년)’, ‘상쇠(75년)’, ‘사는 연습(77년)’, ‘등잔불(78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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