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효석 '역사'

clint 2023. 7. 21. 12:23

 

1939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기로 했고, 머지않아 잡지들마저 폐간될 운명이었다. `문장`은 가람 이병기와 이태준, 정지용이 주도한 한국어 문학의 심장과도 같은 잡지였다. 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이효석은 `역사`라는 이름의 희곡 한 편을 발표한다. 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희곡은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들의 운명에 대한 천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효석은 시공간적으로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예수의 시대로 독자들을 이끈다.

 


바야흐로 예수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 마리아와 마르다, 나중에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유다 그리고 마리아를 사랑하는 토마스 등이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가난한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를 나흘 만에 죽음에서 소생케 한 후 예수는 그의 누이들의 초대를 받는다. 마리아는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예수의 발등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여인이다. 토마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당시에 `열심당`(젤롯당)이라고 불리던 무력 투쟁 집단의 일원이다. 열심당은 수탈을 일삼는 로마제국과 헤롯 왕의 압제에 희생적인 투쟁으로 항거하고자 했다. 세 개의 길이 이 작품 속에서 제시된다. 하나는 토마스의 길을 따라 무력 투쟁의 길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길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유다처럼 물질적 이욕에 사로잡혀 숭고한 길을 저버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길이 올바르며 가야 할 길인가?

 

 

이효석



1939년은 당시 문학인들에게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본격적인` 대일 협력의 길에 접어들었다. 자하문 너머 세검정에 있던 별장을 파는 이야기 `육장기`(`문장` 1939년 9월호)에서 이광수는 장편소설 `사랑`이 보여준 종교 통합적인 사랑의 길 대신에 당면한 전쟁을 승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채만식은 `냉동어`(잡지 `인문평론` 1940년 4~5월호)를 통하여 엄혹한 감시와 억압의 시대의 `냉동어`처럼 꽁꽁 얼어붙은 지식인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그가 나중에 `민족의 죄인`(잡지 `백민` 1948년 10월호)에서 명명한 `대일 협력`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유다`가 되는 길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다른 무력 항쟁의 길이 있을 수 있었다. 도쿄제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아쿠타가와상 후보작가로까지 올랐던 김사량(1914년 3월 3일~1950년 10월?)은 중국에 파견된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실제로 무력 항쟁의 길로 나아갔다.

 

가롯 유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저 옛날 예수의 가르침처럼 세속적 항거나 투항 그 어느 쪽도 아닌 종교적 승화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는가? 이 길은 너무나 좁고 앞에 제시된 두 개의 길보다도 이해받기 어려운 길이었다. 희곡 `역사`를 통하여 이효석은 당시의 한국인들, 문학인들 앞에 펼쳐진 운명적 선택의 길을 보여주고 그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내면적 고뇌를 겪고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이 희곡은 그러니까 일종의 알레고리, 당시 한국인들의 운명적 선택의 문제를 예수의 시대 그것에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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