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단란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고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 생활 속에서 성장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성년이 되었을 때의 불만이라면 왜 친구와 남편이 좀더 자기를 아껴주지 못 하는가,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세상과 부대껴 가면서 느낀 것은 그녀의 삶이, 환경이 남달리 가혹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도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성장기의 꿈이 좌절되는데서 오는 고통을 쉽게 이겨내지 못 하는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성년이 되어서도, 가정을 갖고서도 그는 청년기적 방황을 멈추지 못했다. 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 같은 그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술을 즐기고 잡기에 빠져드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그의 그 지극히 평범하다 할 삶의 방식이 그녀에게는 곧 고통을 의미했다. 결혼 전 그녀에게 더 없는 이상형으로만 보였던 남편이 자아를 상실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한창 행복해야 할 친구의 자살도 어쩌면 그 친구가 갖고 있던, 삶에 대한 깊은 회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이혼을 생각하며 별거에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별거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녀는 오히려 저 바닥 깊이 가라앉아 있는, 남편과의 끈끈한 정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은 다시 결합하고 아이들 기르는 데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잃고 나이 들어서 다시 방황하던 남편이 빗길 교통사고로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혼자되어서 더욱 깊게 부부애를 느낀다. 남편의 존재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대단한 것이어서 화장한 유골을 오랜 기간 동안 안방에 보관해둘 정도였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출 줄 몰랐다. 결혼한 딸은 행복하지가 않았고, 가족의 기둥이었던 아들은 홀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범했다. 그 결과 그녀는 정신이상에 가까운 중세를 보이며 혼자 아파트 속에 칩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연극 작품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독특한 형식적 실험을 보이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의 공간은 어느 아파트의 거실과 공원이다. 이 공간에서 다양 한 현대 도시 중산층의 일상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정신적·심리적으로 불안하고 균열되어 있는 현대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대에서 70대의 노인까지 성별, 연령별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의 생활을 지켜 보는 우리는 위태로운 이들의 삶에서 우 리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총 17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각 장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내용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숨겨져 있음을 느끼해 준다.
빈 그네의 움직임과 함께 시작되는 이 작품은 각기 서로가 단절된 사람들의 외로움, 현실로 부터 강요된 일상적 불만, 과거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딸들, 부부간의 정서적 단절, 과거에 대한 집착,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잘못된 관계, 구조조정으로 고통받는 가장 둥둥의 다양한 삶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그려나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한 명의 배우가 2-3명의 역할을 맡고, 특히 다양한 연령대를 표현하는 것이 관객들에게 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배우들의 역할 변화 를 통해 드러내어지는 것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결국 나의 일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 위기 속에 있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이며,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리가 언제는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를 질문하듯.
작가의 글 - 박평목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외롭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 화두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움의 궁극이라 할 죽음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일상적 삶이란 말은 우리에게 변화와 자극이 없고 깨어 있는 의식이 없 는 생활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런 삶도 조금만 비껴서서 그 바닥을 들여다보면 원초적인 고독과 죽음의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외로움의 선율을 찾아보 고 그 선율로써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다.
작가소개
한해 동안 작품 2편으로 단번에 극작가의 위치를 굳힌 박평목씨,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당선한 작가였지만 '92년 서울연극제 에서 <누군들 광대가 아니랴>로 기성작가들을 제치고 희곡상을 타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가 이렇게 빠른 시간안에 작가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까닭 뒤에는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10여년 세월이 있었고 끝없이 자신과의 갈등 속에 갈고 닦은 습작기가 숨어있다. 48년 서울생인 그는 불혹의 나이에도 글쓰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경기공업전문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74년 「한국전력」 에 입사하여 연극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들을 해 왔지만 그속에서도 그는 작품등을 구상하고 하고싶은 문학, 희곡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고 한다. 「신춘문예 당선작 <보이지 않는 손>이 연출가 협회에 의해 공연된 후 극단뿌리 김 도훈씨에게서 작품의뢰가 들어왔고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이 사회의 단절과, 상실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고 싶었고 그에 저항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통해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소모되고 단절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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