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은 한 철거민 가족의 이야기다. 철거대상지역 반파된 가옥,
평상에서 거주하는 가족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무대는 배경 쪽 다 허물어진 세멘벽돌 벽에 창문만 덜렁 달려있고,
좌우의 벽도 마찬가지이다. 구멍 뚫린 천정도 곧 내려앉을 듯한 형상으로
매달려 있다. 무대 왼쪽의 이 집 출입문 역시 문만 앙상하게 서있고
무대후면 오른쪽 등퇴장로는 화장실 겸 욕실의 출입구로 설정이 된다.
후면 벽 가까이 낡은 의자와 가구가 쌓여있고, 무대중앙에 크고 넓적한
평상이 자리를 잡았는데, 평상은 한쪽다리가 낮아 갸우뚱하게
기울어진 상태로 놓여있다. 평상 뒤 무대 왼쪽천정에서 줄에 매단 그물침대
해먹이 흔들거리고, 평상 앞 무대바닥에는 종이지도와 화투짝, 카지노용
모조지폐 등이 널려 있다. 배달용역을 하던 아버지와 음식배달을 하던 아들,
그리고 그 집 주부가 철거지역 안 폐가옥에 칩거하고, 부근 중국집 배달원이
자장면을 철가방에 담아온다.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모자(母子)의 독특한
일상이 펼쳐진다. 모자(母子)는 마치 대저택에서 지내는 부호인양
행동거지와 사용하는 언어의 독특하기가 언어의 유희가 자못 능란(能爛)하고,
대사마다 세태가 반영되어 폭소를 유발시킨다. 비록 자장면 배달을 시키고,
음식 외상값이 누적되었어도, 아들은 음식배달원 선배로서의 위용(?)을
보이며 음식 값을 추후로 미루고,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이 재벌회장 부인을
대하듯 정중하기 그지없다. 어머니 역시 아들의 대사에 부응하듯 재벌부인인양
거들먹거리고, 하녀를 자주 부르지만, 하녀가 있을 리 만무. 아들이 피곤해 눕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는 해먹을 가리키며 이층 방으로 올라가 쉬라고 이른다.
아들은 흔들거리는 해먹에 누웠지만 건물 철거소음이 폭발음처럼 들리면서
점차 가까워지니, 불안감과 공포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자는 자연스럽게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장면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반백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강원도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 있는 폐가옥을 발견하고,
집주위에 농사지을 터전이 널려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리로 이사를 하자고
아내와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부근에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곳이 있어,
무 배추를 출하할 때 트럭에 옮겨주면 품삯을 받을 수도 있고, 닭이나 토끼를
기르며 살 수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무위도식이 몸에 밴 어머니와 아들은
아버지의 건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노숙자 생활이 몸에 배면 일자리를 주어도
대부분이 거부하거나, 얼마 못가일자리를 때려치우듯, 이들 모자에게는
아버지의 말이 당나귀 귀에 찬송가 부르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모자는 이 철거대상가옥에 그대로 머무르기를 고집한다. 그러면서 아들은 넓적한
평상 한쪽을 잡아끈다. 평상이 분리되면서 평상 3개를 합쳐 놓은 것이라는 걸
관객은 그제에야 알게 된다. 대단원에서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평상
한 개씩 차지한 듯 평상을 갈라놓은 장면에서 연극은 끝난다.
이 작품은 집의 주제와 관련한 '철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2013년 이우천 연출에 의해서 이미 초연되었었고, 원래는 김승철 연출과 극단 아르케에 의해 낭독 초연되었던 공연을 김승철 연출이 다시 재공연. 이우천 연출의 초연을 보지 못했지만, 두 공연을 모두 다 본 사람의 평에 의하면, 이우천 연출의 초연이 그로테스크했다면, 김승철 연출의 공연은 따뜻하다는 평. 김승철 연출의 공연이 따뜻하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음악 라이브 반주 때문인듯. 극단 아르케의 음악 담당 공양제 덕분에 극단 아르케의 모든 음향과 음악은 라이브 연주. 극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리가 강한 극단 자체의 성격이 반영된 결과. 철거민 어머니 '응봉동 사모님'과 아들이 벌이는 부르주아 놀이는 흡사 장 주네의<하녀들>의 마님놀이처럼 보이고, 그러한 놀이를 강화시켜 주는 장치로 장면 전환마다 정지 화면을 만들어내어 엄마와 아들의 희화화된 성격을 반복시키는 아이디어는 흥미로웠으나,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오로지 윤미현 작가 특유의 시니컬하고 비틀린 대사의 힘 자체에서만 나오고 있는 것은 극 중반 이후 역부족으로 느껴지고, 극 후반 무대에 실제로 빨간 페인트 글씨로 '철거'라는 단어가 씌어지는 순간 이후의 모든 부르주아 놀이의 놀이 성 자체가 힘을 잃는다. 그리고 그때 들어오는 강력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아버지의 존재. 강원도 어디쯤에서 가져왔을 법한 강아지풀이 연상시키는 장면의 강렬함도 순간. 현실을 상징하는 그 아버지마저 아내와 아들의 놀이에 함께 동참하는 장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철거'라는 실제 단어가 무대에 씌여지는 순간, 기존에 반복되던 놀이성이 좀더 변형된 형태로 발전될 필요가 있고, 그 순간 들어온 아버지의 장면은 좀 더 장면을 생략하고 간결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작가의 원작을 그대로 공연하는 미덕도 중요하겠지만, 작가와 연출의 관계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 새삼 다시 고민하게 만든 작품. 연극<평상>에는 철거 직전의 누추한 응봉동 반 지하에 살면서 중산층 코스프레를 하는 모자(母子)가 있다. 파출부 엄마는 주말마다 오히려 집나간 파출부를 집에 둔 ‘응봉동 사모님’이 되고, 아들은 엄마의 (부루마블)땅문서를 관리하며 수십 개의 건물을 손에 쥔 모습을 보인다. 그들만의 행복을 향한 고통스럽고 처절해보이기까지 하는 몸부림은 결국 가족의 와해로 이어진다.
작가의 글 - 윤미현
“집 나온 어린이가 다시 집에 들어와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철없는 것들이 꼭 그렇지. 세상이라는 게 혹독한 한겨울인지도 모르고, 그저 혼자 좋다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덜 떨어진 생각으로 집을 나간 것이다. 철부지 어린이, 그게 나였다. 김승철 연출님이 계신 그 대문 안으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두 손 두 발 동상에 걸린 채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채였다. 그 언 손과 언 발로 다시 희곡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마음도 이미 얼어붙을 채였으므로, 나는 달걀 껍데기를 까고 막 뛰쳐나온 병아리 새끼인지도 모르고. (집 나간 그 병아리새끼 그나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한 일. 마치 집 떠나서 불량식품을 잔뜩 사 먹고, 눈치만 보고 있는 그런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김승철 연출님이 받아주셨다. 닫혀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대문은 빠꼼히 열려 있었고, 방 가득 마당 가득 아르케 가족들이 나를 반겨주셨다. 불량식품 같던 세상을 구경하고 온 나는, 그 따뜻한 정에 눈이 휘둥그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후 나는 며칠이 채 안 되어서 다시 착한 어린이가 되어 버렸다. 김승철 연출님이 계신 곳은 언제나 봄이었음을, 왜 이 미련 맞은 윤미현만 몰랐던 것일까? 한 작가가 쓴 글을 이토록 아껴주고 세심하게 봐 주시는 분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동안 한번도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경험이었음을. 그래서 혼자서 감동 받은 채로 책상에 엎드려 울컥하고 말았다. 집 떠났던 어린이, 오늘도 반성하며 다시 책상에 앉아 희곡을 쓸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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