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유진 오닐 '애나 크리스티'

clint 2024. 6. 20. 08:09

 

 

 

<애나 크리스티>는 오닐이 처음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제목으로 1919년에 공연했던 극을 개작해 1921년에 브로드웨이에 올려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오닐은 1920 <지평선 너머>에 이어 1922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원래의 극이 아버지인 크리스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애나 크리스티>는 제목이 암시하듯 딸에게 더 초점을 맞춘 극이다. 오닐의 극으로는 드물게 해피엔드로 끝남으로써 센티멘털하다는 비난도 받은 이 극에서는 초기 오닐 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해양극의 특징, 바다와 육지의 대조, 의지와 운명의 대조 등을 볼 수 있다.

 

 


 

 

바지선 선장인 크리스는 마티라는 여자와 함께 바지선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자니 더 프리스트의 술집에 간 그는 오래전에 미네소타의 농장에

두고 온 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을 알게 된다딸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설렘과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한다. 마티는 크리스에게 딸이 오면

자기는 빠져줄 테니 염려말라고 말한다. 

크리스가 술을 깨려고 요기를 하러 간 사이 애나가 술집에 도착하고

마티와의 대화에서 애나는 남자로 인해 불행했던 삶을 이야기한다. 

농장에서 친척에게 몹쓸 일을 당한 그녀는 이후 창녀가 되었고

모든 불행이 남자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마침내 부녀의 감격적 상봉이 있은 후, 애나는 아버지에게 그간의 사연을 묻지만

아버지는 "악마와 같은 바다" 때문이라고 모든 탓을 바다에 돌린다. 

크리스는 애나를 자신이 사는 바지선으로 데리고 간다. 

바다에서의 삶에 적응한 애나는 바다가 점점 좋아지면서 마음과 몸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를 보고 크리스는 피를 속일 수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어느 날 밤 폭풍우가 일어나고 두 사람은 조난당한 선원들을 구출한다. 

그중 한 명인 맷은 처음에 애나를 크리스의 정부로 오해했다가 나중에

정숙한 여인으로 알고 거의 구애할 뻔한다. 이들이 친해진 것을 보고 크리스는

더욱 불안해하면서 이번에도 바다가 못된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맷에게 빠져드는 애나를 보고 크리스는 평범한 남자를 만나 농장에서

살라고 권유한다. 애나는 그러한 삶이 어떤 건지 아느냐고 반문하며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간다. 이때 맷이 들어오자 크리스는 맷과 애나의 결혼을

반대한다고 맷에게 말한다.  두 사람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이때 애나가 들어와서 자기도 맷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들이 자신을 놓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자신은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하면서 농장에서 어릴 때 겪었던 일과 자신의 직업을 밝힌다. 

맷은 흥분해서 애나를 때리려다가 나가버리고 크리스도 나간다. 

이틀 후 크리스는 맥주를 사서 다시 들어와 애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모든 게 자기 탓이라 말하는 크리스에게 애나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말한다. 

크리스는 내일 배를 타고 나가기로 계약했다고 말한다. 

맷을 죽이려고 산 권총을 보여주자 애나는 그 권총을 빼앗는다. 

맷도 애나를 만나기 위해 돌아왔다가 아직 애나의 가방이 그대로 있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맷은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원망하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느낀다. 애나 또한 기차를 타고 떠나려 했으나 떠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맷은 다음날 배를 타려고 계약한 상태이며

떠나기전에 애나에게서 이 세상에서 사랑한 유일한 남자가 자신이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한다. 이때 크리스가 들어오고 모두 화해하며 건배한다.

 

 

 

 

이 극에는 오닐의 초기 극에서 볼 수 있는 바다와 육지, 현실과 환상이라는 양극성의 주제가 등장한다. 오닐은 <고래>, <집으로의 긴 항해> 등 해양극에서 바다와 육지 생활의 장단점을 대조시킨다. 육지에서 답답하고 숨 막히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 바다가 주는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려는 꿈을 꾸고,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뱃사람들은 항해를 마치고 돌아가 육지에서 안정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바다는 낭만과 자유, 또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마음을 정화시키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풍랑과 폭풍의 위험을 안고 있다. 육지는 안정된 삶을 보장하지만 폐쇄되고 편협하며, 세상의 타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양극적인 대조가 가장 극명하게 잘 표현된 작품이 오닐의 첫 번째 퓰리처상 수상작 <지평선 너머>.

 

 

 

 

<애나 크리스티>에서도 크리스는 대대로 남자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던 운명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애나를 미네소타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친척에게 맡긴다. 크리스에게 바다는 위험과 고난을 의미한다. 따라서 크리스는 가능한 한 애나를 바다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것이 애나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애나에게 바다는 죄로부터의 정화와 자유를 의미한다. 그녀는 아버지와 떨어져 농장에 홀로 있으면서 친척 남자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으며 그로 인해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바지선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자신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며 바다 생활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크리스는 이런 애나를 보면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을 느끼면서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전조를 본다. 애나는 모든 탓을 남자들에게 돌리는 반면, 크리스는 모든 잘못을 바다에 돌린다. 바다가 주는 운명적인 예감은 맷이 등장할 때 사실로 확인된다. 맷 또한 바다에서 운명적인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바다를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 세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바다, 운명, 남자 등 외부 요인으로 돌리면서 서로를 원망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이해와 관용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정체성과 직면한다. 이 극은 오닐의 다른 극과 달리 할리우드식의 해피엔드로 끝났다고 해서 센티멘털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극의 전개와 등장인물 성격에 맞는 적절한 결말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애나라는 인물은 직업은 창녀지만 마음만은 곱고 순수한 원형적 캐릭터다. 이러한 타입의 캐릭터는 오닐의 후기 작품에도 등장한다. 그녀는 비록 교육은 못 받았지만 삶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지혜를 지녔다. 추한 세상에 살면서도 그곳에 물들지 않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겨 내려는 강인한 의지가 있는 여성이며 풍파에 지친 남성들에게 구원을 제공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그녀에게는 오닐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이 녹아있다.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낯설고 외로운 곳에 살면서 남자 친척에게 유혹당한 것처럼 오닐 자신도 기숙 학교에 다녀야 하는 외로움을 겪었고 알코올 중독자인 형으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았다. 또한 크리스나 맷이 겪는 바다에서의 경험은 오닐이 젊은 시절 바다에서 겪었던 경험을 반영한다. 자유를 갈망해 바다로 나갔지만 그곳에서 육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겪으며 집으로의 긴 항해를 해나가는 경험을 오닐 자신도 했던 것이다. 크리스가 본거지처럼 드나드는 자니 더 프리스트의 술집은 오닐 자신이 한때 시간을 보냈던 뉴욕의 부둣가에 있는 술집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술집은 나중에 <얼음장수 오다>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