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은 카프카(Franz Kafka)의 동명의 소설을 드라마로 개작한 작품이다. 소설은 연극과 속성상 많이 다른 매체이다. 이는 원작을 충실하게 무대화하더라도 나타나는 문제이다. 따라서 소설을 연극으로 개작할 경우 그에 대한 일정한 변형이 불가피하다. 바이스는 화가, 영화감독, 극작가, 소설가 등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들 매체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을 저술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극 구상에 있어서도 그러한 생각들을 반영하고자 했다. 사회주의자 바이스가 매체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과 극적 전략은 ‘변형된 본받기’의 한 사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이스는 카프카 <소송>의 주인공 K를 전쟁 직전의 자본주의로 불러오고 있다. 이로써 카프카 소설이 지니는 비의성과 다층적인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극을 통해 관객을 무대 밖 현실로 불러내려는 브레히트와 바이스의 극적 의도에서 볼 때 이를 비판할 수만은 없다. 큰 틀에서 보면 바이스는 원작에 대해 기록극적 자세를 취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 구도를 고려하고 원작의 표현을 광범위하게 취한다. 2막 18개의 장면에는 원작의 인물과 무대, 사건들이 고루 반영된다. 그리고 바이스는 소송에 대한 카프카의 상상을 좌절된 에로티즘 관계들과 권력 관계들이 중첩된 삶의 과정으로 보는 해석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바이스는 결정적으로 형이상학적 연관의 여지를 없애려 하고 작품 내부의 신비적인 힘들을 가능한 한 축소하고자 한다. 일종의 정거장식 구성을 통해 <소송>의 사건들을 따르면서도 그것에 사회적ㆍ역사적 배경을 부여함으로써 정치극적 성격을 분명히 한다. 각 장면들은 K가 경험하는 소송의 중요한 사건들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소설처럼 연대기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목표를 향한 사건의 전개는 포기된다. 오히려 판결을 피하거나 소송을 좋은 결말로 가져가려는 K의 시도가 정거장식 구성을 통해 묘사된다. 이로써 원작의 역사적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대폭 축소된다. 바이스가 그려낸 소시민 K는 사실 ‘속물’(snob)에 가깝다. 그는 현실에 대한 순응 능력, 비굴함, 기민함 등의 자질들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하직원이 매질을 당하거나 삼촌이 그의 소송 사건을 상의하려 방문할 때 오로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아야 할텐데 하는 걱정뿐이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K는 권력의 ‘신민’(Untertan) 혹은 ‘충복’의 모습이다. 바이스가 보기에 법정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는 폭력 그 자체이다. <소송>은 공포와 폭력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K는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조건 고용을 갈구하고 해고를 두려워하고 고용관계에 매달리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그런 점에서 K는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는 ‘이등시민’이 되지 않기 위해 실제적인 ‘생명박탈’의 위험에 처해 있는 프롤레타리아와의 연대를 거부한다.
카프카의 '소송(심판)' 을 연극으로 만들기 위한사전 언급 - 피터 바이스
내 연극의 출발점은 카프카의 텍스트에 가능한 한 가깝게 밀착하려는 시도부터다.
내 자신의 허구적 일탈이나 어떤 '시대에 맞는' 현상에 일치된 차원으로 소재를 옮기는 전환은 내게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이전에 이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거나 영화로 만든 경우에도 그런 변화가 있었는데. 이때 변화는 주인공 K를 익명의 소시민으로 혹은 기술이나 정치의 톱니바퀴 속에서 사는 인간으로 특징지어졌다. 극작가는 카프카가 창조한 작품 뒤에 온전히 서서, 책의 내용에 걸맞을 수 있는 장면적 수단만 찾는다. 텍스트의 첨가 부분은, 줄거리 진행에 필요하다면, 카프카의 일기나 편지 그리고 짧은 산문 작품에서 뽑아냈다. 내가 시도한 주제상의 유일한 확대 부분은 사건들을 입성한 역사적 틀 안에 배열한 데 있지만 그러나 이것 역시 매우 절제해서 적용했고, 그것은 카프카 자신의 전기에 근거해 있다. 카프카의 전개 사에 따라 소송이 일어나는 시공간은 1913년 7월 3일부터 1914년 7월 2일 사이이다. 그것은 그의 서른 번째 생일에 시작하여 서른한 번째 생일 하루 전날 저녁에 끝이 난다. 이 날짜는 2차 발칸전쟁의 발발과 사라예보에서의 살인을 둘러싼 시간 - 이 살인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 데에 - 일치한다. 드라마를 이렇게 분명하게 정해진 시공간으로 옮겨 놓은 것은 내용에 최대한의 구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에서다. 이것은 필요불가결 했다. 이 이야기에서 묘사된 것은 하나의 주관적 세계에서 나온다. 무대 작업의 실천은 이념과 사상을 보이도록 만드는데 있기 때문에 객관성이 획득되어져야 한다. 두려움과 환각, 강박관념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개별 인간은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자리한다. 책을 읽으면 귀에 속삭이듯 다가오는 것이 무대에서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전환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환상 속에서 가공하는 꿈의 요소들이 아니라 행동방식과 돌발사건 그리고 행위들이다.
K는 일정한 직업 활동을 한다. 그는 어느 하숙집의 한 방에서 산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사람들은 그를 보고 판단한다. 사람들…그의 동료 행위자들은 동시대의 한 사람을 만나지만. 어떤 비전이 그를 괴롭히는지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K가 무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한 특별한 개체가 살아있는 세계에 나타난다는 전제조건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소설에서 K는 어떤 측정 가능한 시간 속에 있지 않다. 그는 그저 사고 연상들의 얼개 속에서 움직이는데, 이 얼개는 검증 할 수 있는 법칙성에서 벗어나 있다. 책을 읽어 보면, 이것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외부 세계에 관해 언급되는 것 이라곤, 꿈의 분석이란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낮의 잔여물로 지칭되는 것뿐이다. 문학의 중심을 에워싼 사회적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어떤 의식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외부 현실의 언어로 번역할 때 (그리고 관객에게 무대는 늘 하나의 외부 현실에 상응하는데) 시간 차원에 대한 의존 관계가 즉시 발생한다. 무대는 하나의 논리나 요구한다. 극도의 불합리성 속에서도 모든 행동 조처는 앞선 조처 위에 자리 한다. 책을 읽을 때 그런 일관성에 대한 요구는 사라진다. 현재적 순간은 언제나 다시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 시간 속의 틈은 심사숙고를 통해 메워지기도 한다. 말해진 것과 듣는 것 사이에는 어떤 분리도 없다. 내용을 무대에서 공연할 때 거리가 생겨난다. 무엇이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한때 체험되었고 지금은 추체험되는 어떤 전형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K는 글의 인물로서 완전히 자기 자신 위에 서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 자기에게 충분했던 사람인데, 이 K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 미치는지 무대에서 확인된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 눈에 띄었던 사실은, K를 끌어내려 결국 파괴하는 힘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소시민성의 힘이란 점이었다. 그가 고통당한 모든 것. 그리고 절망적 노력에도 그가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만든 완고한 편협성, 법률, 그리고 광기의 영역에서 나온다. 가장 가까운 그의 주변 사람이란 소시민들이고. 그는 이들의 판단에 노출돼 있다. 이들과 마주해서 그는 자기를 주장하려 하고, 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며, 그들 요구를 바르게 평가하고자 한다. 그는 이런 사회의 일원으로 있고, 삶의 태도에서, 그의 직업에서, 그의 거처에서 그리고 책임 있는 관청과 사무실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일 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그는 관습의 서열화 속에서 여전히 자기를 확신한다. 그런 후 가중되는 압력 아래 일을 더 이상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때, 그는 그 모든 계율과 단절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반대다. 즉 그는 이제 그 계율의 의미 안으로 들어서려 한다. 거기서 계율의 비인간성을 인식할 때조차도 그는 반역하지 않는다. 그는 굴복하고. 결국 자포자기한다. K가 처해 있는 죄과의 상태, 그리고 자기를 정당화해야 하는 끊임없는 충동은 종교적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신화적 힘들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 힘들은 완전히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고, 그것은 강요와 협박을 통해 낡은 사회제도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의 것이다. 이 사회의 대변자들은 비열함과 거짓 속에서 자기를 들어낸다. K는 이 모든 걸 분명하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늘 그를 다시 거짓의 옹호자들 - 억압에 봉사하는 판사와 법정에게로 이끈다. 그의 계획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기만에 있고, 그는 이 기만에 헌신한다. 그에게 나타나는 사람들은 가장 지위 낮은 관리나 막일꾼, 그리고 앞잡이들이고, 그래서 그는 더 높은 심급에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며, 이들에게 도움과 정의를 얻고자한다. 이에 반해 저 위에는 거짓과 강제의 진짜 관리자들이 머무르고 있다. 그가 지칠 대로 지쳐 순응하게 되는 것은 사실 이 사람들 때문이다. 그가 관계하는 소매상인이나 속물들, 부패한 출세주의자들은 그에게 사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은 체제의 도구일 뿐이고, 그래서 K만큼이나 부자유하다.
삶에 적대적인 세력들로부터 그는 왜 등을 돌리지 않는가? 왜 그는 마음 편해지는 상태를, 이런 상태가 있음을 예감함에도 찾지 못하는가? 왜 그는 자기를 짓누르는 걸 없애기 위해 분노와 절망의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계급 속박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도하는 모든 것은 그의 현존을 지금까지 규정했던 규범들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 영역에서 한 은행의 수석 대리라는 높은 자리까지 차지한다. 그에게는 부하 직원과 급사가 있다. 그들에게 그는 상관이자 명령자로 나타난다. 그는 만나는 여성들을 가부장적 소유의 틀에 따라 대한다. 그는 스스로 다른 사람을 경멸한다. 그가 만난 동료 피고인들은 늘 그와 같은 부류다. K는 이런 소송에서 자기 계급에 결박된 자다. 그는 가난한 자들, 노동자들의 숙소를 지나간다. 그들 눈에 그는 은행의 대표자로서 한 명의 적이다. 그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그래서 진리에 더 가까이 그를 데려갈 수도 있었음 다른 소송은 그에게 닫혀 있다. 그는 자기가 불변이라고 간주하는 자기 질서의 일그러진 거울 사이에 속박되어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이 허약함에 의해 허물어진다. --- 피터 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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