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철희 '조치원 해문이'

clint 2022. 10. 12. 16:26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일대가 세종특별자치시로 변경, 확정되던 2012년 혼란기의 조치원읍 마을이 새로이 행정수도가 된다는 정부 발표와 이에 대한 정치권의 갑론을박이 한창인 가운데 조치원 일대는 땅값이 치솟고, 마을은 흥청대다 가라앉고, 주민들이 흥분하기를 되풀이한다. 서울에서 연극을 하던 해문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을 이장직은 삼촌 이만국이 이어받게 되고, 이즈음 해문이의 친구들은 마을회관에 출몰하던 해문 아버지의 유령을 목격하게 된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해문은 아버지의 죽음에 삼촌이 개입돼 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는데…… 이때부터 의혹의 규명과 복수를 위한 치밀한 계획, 돈과 땅문서를 둘러싼 광기어린 욕망의 추구, 죽음의 대결이 펼쳐진다. 웃음의 폭죽놀이와 아울러 ……

 

 

 

 

마흔, 아니 서른 일곱 살이 되도록 받아주지 않아서연극도, 상경도, 군대도, 결혼도 못한 해문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해문 아버지의 성국은 유령으로 해문 앞에 나타나고, 해문은 어째서 아버지가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이장으로 성국의 동생인 만국이 등장한다. 그리고 해문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심을 품게 된다.

 <조치원 해문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 연극이 사실은 <햄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햄릿>을 인식하게 되면서 배우와 배우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연극은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예측하게 된다. <조치원 해문이>는 끊임없이 이 연극이 <햄릿>과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호소한다. 주인공인 해문이가 햄릿이라는 사실도, 여자친구인 오피리가 오필리아라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다. 중간에는 해문이가 <햄릿>의 대사를 읊조리는 부분까지 등장한다. 심지어 과거 연극을 했던 극단 배우들이 해문이 고향으로 내려와 연극을 상연하는데요. 그 연극이 <햄릿>이다. <햄릿>을 내화(內話)로 설정하며, 동시에 외화(外話)<조치원 해문이>가 햄릿과는 다른 현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햄릿>에서 햄릿은 작은 아버지인 클로디어스에게 <쥐덫>이라는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행동을 확신한다. <쥐덫>이라는 연극의 역할을 <조치원 해문이><햄릿>이 대신하고 있다 <햄릿>, 그리고 <조치원 해문이>를 이루고 있는 핵심은 욕망이다. 욕망은 모든 이야기의 원인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공간적 배경인 조치원은 욕망을 표현하고 적절한 공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늙은이들만 남고, 농사하는 대로 손해 보는 이곳은 죽음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세종특별자치시 선정 소식에 따라 조치원은 이들의 뜻과 상관없이 땅값이 치솟고, 치솟는 땅값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욕망이 조치원에 모이며, 있던 사람들도 차츰 숨겨놓은 욕망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만국은 이장으로 취임한다. 욕망을 가장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인물로 주인공은 알고 보면 만국일지도 모른다. 햄릿에서는 마찬가지로 권력욕에 클로디어스가 형을 살해하는데, <조치원 해문이>에서는 만국이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했는가?’에 대한 답으로 사랑과 관심의 결여를 제시한다.

 

 

 

 

 성국의 영혼이 오피리에게 내려와 오피리의 입을 빌려 만국을 꾸짖는다. 만국은 자신이 어렸을 적 외면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권력욕과 같은 욕망이 관심을 갈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은 타당하나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만국의 행위에 대한 설명이 명쾌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욕망은 쌓이고 쌓여, 점차 방향성을 잃고 무작정 전진만 거듭하고 모두가 모인 마을 잔치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욕망은 모두를 무()로 돌려버린다. 욕망의 끝은 허무함밖에 없다고 했던가.... <조치원 해문이>의 마지막 춤판은 그러므로 허전하고 쓸쓸하다. 만국은 늘 주변에 여기가 세종시만 되면이란 말을 즐겨한다. 세종시를 위해 기꺼이 잔치도 열고,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데... 과연 세종시가 이뤄지면, 모든 것이 끝나고 행복해졌을까? 삶이라는 흐름이 세종시하나 때문에 크게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물질적인 행복이 결코 인간의 상처를 낫게 하진 않는다 해문이, 권력욕에 눈이 멀은 만국, 해문이를 지키려는 언년,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풍에 걸린 세익이 모두 욕망의 희생자며, 불쌍한 사람들이다. 특히 이러한 욕망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여든 욕망이라는 사실은 이 연극을 더욱 씁쓸한 연극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작가의 글 이철희

나는 배우입니다. 어렸을때부터 꿈꿔왔던 일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들을 견디어야 한다는 건 배우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숙명이지요. 그 기다림의 무게는 한 작품을 더 했다고 해서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을 견디어낼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글을 써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들을 견디어 내기 위한 치열함이 나를 더 용감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조치원 해문이'의 초고는 3년 전이였습니다. 당시 남산예술센터의 '초고를 부탁해' 프로그램에 공모하게 되었는데 형편없이 미숙한 글임에도 장문의 피드백과 가이드라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았다는 묘한 쾌감에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전혀 익숙해질 수 없는 또 다른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즈음……… 나는 노트북 속에 박제해둔 '해문이'를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찰라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에 두고, 그 한 줄의 메모가 글 안에서 제 몫을 해낼 때는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처럼 짜릿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벽산희곡상'에 공모를 하였고- 감히 당선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무료했던 시간에 나도 뭔가를 하고 있다는 위로를 찾으려던 행위는 나의 절실함과 만나 '4회 벽산희곡상'에 당선되는 깜짝 선물로 이어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연 되어진다니 가슴이 다시 콩당콩당 뛰기 시작합니다.

'조치원 해문이 속의 인물들은 가족이라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고, 울퉁불퉁, 비뚤비뚤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래도 이들의 삶은 '세종시'로 변하기만 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희망으로 더 치열해집니다. 하지만 결코 변화하는 환경이 내재된 인간의 상처를 안아줄 수는 없나 봅니다.

피리 : (그런 만국을 안아주며) 만국아! 다들 백힌채(박힌채)로 사느니라. 가슴이 시뻘건 송곳 하나씩 안 꼽고 사는 사람 없느니라. 거기에 피가 몰캉몰캉 나두, 안 아픈척 이빨 꾹 깨밀고 사느니라. 지들이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느니라.

우리 모두는 아픈 채로.... 아픈 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고 울고, 누군가의 쓰린 이야기를 들어도 주고, 또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용기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 희곡에 포함된 햄릿33장은 각각 신정옥 역(전예원), 김정환 역(아침이슬), 최종철 역(민음사)햄릿을 참고하여 구성하였고, 결말부의 한 대사는 존경하는 정의신 선생님의 20세기 소년 소녀 창가집의 한 부분을 오마쥬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나는 여전히 배우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