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고영범 '서교동에서 죽다'

clint 2022. 7. 27. 16:39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극중 인물 진영이 암으로 투병 중인 누나 진희 병문안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전적 이야기이다. 기억이 퇴화되어가는 시대에 작가의 과거 삶을 무대로 소환해 내는 고백적 서사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도 극적 장치로 설정되는 흔한 방식이기도 하다. 프레시백으로 투사되는 작가적 상상이 극적 판타지로 전이되어 강렬한 파열음으로 무대, 텍스트, 이미지로 드러날 때 고백적 서사는 현재화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영범 작가가 기억으로 복원하고 무대로 재생시키는 기억의 방식으로 그려내고 배치하는 전략이 70년대 홍대거리와 서교동의 주택가를 기억해내는 색다른 방식으로 <서교동에서 죽다>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작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는 7080년대 부촌(富村)으로 상징되던 서교동 주택가 시절도 소환되고 아버지 사업 실패로 화곡동 시장통으로 이사해 능숙한 솜씨로 연탄불을 갈아치우던 기억들로 포개진다. 엄마의 과일가게 장사 이야기, 고교 시절 안국동 운현극장 김인태 배우의 <세일즈맨의 죽음>의 기억들, 버스를 타고 서교동 작은아버지 댁으로 심부름 다니며 객기로 시장통 아이가 되어가는 진영과 진수의 과거들이 흑백사진의 선명한 이미지로 재생된다. 작가의 과거 기억들은 홍대 입구 사거리 찌개 집 2층에서 문득 내려다본 풍경을 통해 과거 이미지가 재생된다. 청기와 주유소 인근 서교동 주택가가 개발되기 이전 개천가에서 뛰어놀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작가는 그 후로부터 10년에 걸쳐 아이의 모습이 잊을만하면 떠오르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작가기질로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기억의 정점(頂點)에는 동생의 죽음과 가족의 삶, 아버지의 죽음이 맞닿아 있다.

 

 

 

 

<서교동에서 죽다>는 자전적 이야기이면서도 흉터로 패어 있는 가족사를 통해 죽은 동생과 마주하고, 아버지 사업 실패로 서교동을 떠나 연탄불을 갈며 버티던 화곡동 시절과 죽음들을 기억해 낸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내밀 때는 등장인물과 마음이 동화되고 짠하다. 기억은 서사의 중요한 극적인 장치로 활용되기도 하고 뻔뻔한 작가의 상상력이 발동되어 서사를 확장하기도 하지만 <서교동에서 죽다>는 서술 장치에 기술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기억이 퇴화되어가는 시대에 70년대는 나의 이야기이고, 시대의 상처이기도 하다.

 

 

 

 

무대는 62년생 극 중 인물 진영의 파편적인 기억을 재현하는 시간의 방처럼 느껴지는 구조다. 직사각형의 무대의 4면은 직선으로 촘촘하게 갈라져 있으면서도 면의 간격은 불규칙한 선()이 보이는 나무 마루로 무대 바닥을 채우고 무대 뒤쪽은 바닥을 경사진 사선으로 올려 현재와 과거(화곡동 시절 아버지의 방, 운현동 실험극장의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 장면을 재현시키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앞 무대 공간은 현재의 공간(편의점, 병원)과 과거와 현재를 병치하는 공간(화곡동 시절과 서교동 집, 만화가게, 버스 안, 진수의 어린 시절, 시장통, 진희의 이혼 이야기)등의 공간이다. 마루구조와 동일한 무대 좌우 뒷면은 영상을 투사해 진영의 무이식으로 존재하는 서교동의 길가, 개천, 70년대 동네 전경과 진영의 파편적인 이미지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과거 시간의 이미지(장소)들을 투사해 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서교동에서 죽다>의 극중 인물 진영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과거기억을 재현해 내는 서술자이자 일인칭 화자(話者)로 특정기억을 설명하기도 하고 과거 시간의 시점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인물로 분하면서 고백적 서사를 꺼내 놓기도 한다. 극은 진영이 시시콜콜한 한 아재의 이야기라고 숨기지 않고 시작되는데 미국에 온 진영은 캐리어를 끌고 누나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부터 극은 전개된다.

진영의 기억이 발현되는 시점은 디지털창작콘텐츠과에 다니는 조카 도연으로부터다. 도연은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잖아요. 엄마, 아빠하고 살아온 시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김밥이라고 생각하고, 잘 드는 칼로 그 단면을 자르는 거예요. (중략) 그 특정 시공간에 있는 엄마랑 아빠한테 가는 지도를 만드는 거예요. 이를테면, 일곱 살 때 엄마 아빠랑 과천 동물원에 갔던 적이 있어요. 어린이날, 녹번동에 살 때였고, 전철을 타고 갔어요. 그 길을 가능한 한 그대로, 세밀하게 복원하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기억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은 시간의 복원을 통해 중2때 이혼한 부모님으로부터 분열되었던 자아를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감으로써 손상된 시간과 자아를 잘라내지 않은 퉁퉁한 김밥 한 줄처럼 회복하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다. 도연은 전 그때의 그 애가 내 등 뒤 어딘가에 붙어있다고 상상하곤 해요. 어느 날 너무 너무 피곤하고 우울하면 그 애가 물에 젖는 솜처럼 내 등에 업혀 있는 거라고 상상해요라고 말하면서 과거 시간의 흉터는 트라우마로 나타나고 자신을 붙들고 있는 과거의 존재들과 직접 부딪히는 기억의 여행을 제안한다.

 

 

 

 

진영은 홍대 입구 앞 청기와주유소를 지나 서교동 주택과 화곡동 시절로 돌아가며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도연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바라보게 된다. <서교동에서 죽다> 에서 과거 시간을 온전하게 기억하는 인물은 누나 진희과 형 진석이며 진영의 노모는 여전히 화곡동에서 과일 장사를 하던 시절 연탄불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아들 진수의 죽음에 멈추어져 있는데 도연이를 향해 진수야, 진수야를 부르고 도연은 어린 시절 진수(삼촌)가 되어 노모와 진영의 과거기억을 동행하면서 기억의 조각보를 하나의 소설로 완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무대가 진영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은 1979년 안국동 운현극장에서 <세일즈맨의 죽음> 통해 기적을 경험했던 이야기부터다. 홍대에서 도연이를 만나면서부터 청기와 주유소 길가와 개천가 이야기, 버스회사를 하던 아버지 이야기와 사업 실패. 89번 종점 화곡동으로 이사해 과일가게를 하며 시장통 아이로 자란 시절의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마귀할멈이라 불리던 선생님께 채변봉투로 맞은 이야기가 장면으로 그려질 때쯤 웃음이 터지고 버스 회수권으로 동네 만화가에 드나들던 장면을 소환할 때쯤 기억은 선명해진다. 빈 무대는 진영의 기억과 병치 되면서 과거 시간의 장면으로 때로는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며 파편적인 기억들은 극 중 장면으로 재현되어 작가고백은 무대서사로 포개진다. 기억의 시간들이 반환점을 돌 때쯤 진영은 아버지 방 연탄불을 관리하던 이야기에서 극은 종점을 향한다. 세 살 터울인 진영을 작은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동생 진수는 형이 알려준 대로 연탄불을 갈다 가스중독으로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촛불을 들고 촛농으로 개미집을 만들며 삶의 초점을 잃어간 동생의 죽음과 시간의 기억들이 과거에서 현재로 선명해질 때쯤 진영의 서교동, 화곡동 시절의 죽음과 가족사는 도연을 통해 <서교동에서 죽다>로 완성되고 그 기억은 한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시대의 상처로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할 소설로 텍스트화 된다. 비로소 진영은 기억의 복원을 통해 시간의 흉터는 동생을 향한 용서와 아버지를 향한 화해를 기억의 재현을 통해 마주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며, 잘나내지 않은 퉁퉁한 김밥 한 줄의 시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 - 2022년 여름, 고영범

이 작품 <서교동에서 죽다>은 리덕수 화백의 해석으로 재구성된 이미지가 결합되었다. 리덕수 화백은 이야기의 중심인물 중 하나이면서 지금은 글만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진영이 영상 관련 프리랜서였던 젊은 시절, 전혀 엉뚱한 장소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만나 근 이십 년이 넘게 띄엄띄엄 인연을 이어온 사람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인연을 '필로우 북'이라는 부제를 넣어 '리덕수 약전'으로 써서 그의 포스터북 <리덕수 포스터북: 나는 이렇게 쓰였다>에 수록한 적이 있다. <리덕수 약전-필로우 북>에서 이진영이 리덕수를 사고했다면, 이 이야기에 서는 리덕수가 이진영을 읽어낸다. 읽어내서, 이진영이 봤던 그의 마지막 작업인 포스터의 형태로 그려낸다. 리덕수 화백의 포스터 작업은 북쪽의 선전화 기법을 차용해서 남한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인데, 실향민인 이진영의 가족을 다룬 이 이야기와 독특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다. 그의 단단하고 단호한 그리고 ''한 목소리가 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안은 채 성장하는 가족을 다룬 이야기에 다른 차원을 부여해주는 것 같아서 무척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