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서울 도시의 개천은 이따금 범람하곤 했습니다.
에고! 마침 비가 옵니다. 마구 옵니다. 개천은 범람하고, 둥지도, 구슬도 떠내려가네요.
지혜는 동화 작가인 영원에게 ‘작은발톱수달’이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영원이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혜는 서울 성북천 한 산책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고, 영원은 늦게라도 지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영원은 글을 쓰기 위해 어딘가로부터 흘러들어 자신의 삶에 고인 지혜의 삶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만 들여다본다.
그렇게 치유의 모험담, 동화 <작은발톱수달과 구슬>이 영원의 손끝에서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동화작가 영원이 작은발톱수달이 등장하는 동화를 써가며 마주하는 과거의 기억과 꿈, 그리고 쓰여지고 있는 동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며 펼쳐지는 작품이다. 동화 속 세 작은발톱수달의 이야기는 일견 영원 자신의 삶을 유비하는듯 보이지만, '작은발톱수달' 이라는 명명(命名)자체가 증언하듯 수달의 구체성은 생생하다. 세 마리의 작은발톱수달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축소되지도, 수달 종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도룡뇽 영원의 이야기 곁에 머물 뿐이다. 마치 길 잃은 어린 주영 곁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던 길 잃은 할머니처럼 말이다. 그리고 부러 '이야기가 산으로 가길 바란다는 작가의 소망은 자신의 이야기 또한 길 잃은 관객 곁에 그렇게 머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중심으로 박두해들어가지 않는 이야기들의 자리 말이다.
이 이야기가 품은 다양한 이슈, 환경오염, 동물권, 사회적 차별과 소외 등 어떤 것이라도 각자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나 관객은 영원의 기억에 들어가 시공간을 종횡무진 돌아다녀야 한다
무대 위로 이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1인칭도 아니고 3인칭도 아니다. 이 작품을 필자는 다중 인칭 시점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것 같다가도 서술자가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등장인물은 사람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다. 사람이었나 싶으면 다시 동물이 되어 대사를 던진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의 이동도 자유롭다. 이곳은 영원의 방이다. 방 한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노트북이 켜져 있다. 모니터에는 무언가를 쓰려고 했는지 문서작성 프로그램이 떠있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 영원의 앞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동화’가 마주하고 있다. 영원은 동화 작가다. 어느 날 지혜는 영원에게 작은발톱수달의 이야기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비가 오던 날 개천에 사는 수달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나갔던 지혜는 성북천 한 산책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영원은 지혜의 소원대로 동화를 쓰기로 결심한다.
시간은 1997년 지혜의 젊은 날로 돌아간다. 지혜는 재활용 선별장에서 플라스틱 분리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지혜의 작업 공간에 자동화 ‘기계’가 배치된다. 지혜는 사람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분리 작업을 하는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된다. 지혜의 오랜 친구이자 가족인 정현은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의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설상가상 정현은 뜨거운 화마와 힘겹게 싸우다 죽게 된다. 별보다 더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구슬이 비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서울 도심 개천에는 작은발톱수달이 산다. 도시의 쓰레기가 밀려 내려와 둥둥 떠다니는 하천 구석 어딘가를 둥지 삼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수달이 산다. 가끔 도시 개천은 범람한다. 쏟아지는 비에 개천이 범람하면 수달의 둥지도 떠내려간다. 도시에서 밀려난, 삶에서 밀려난 존재들을 품고 있었던 구슬도 떠내려간다.
이야기는 사람과 동물을 오고 간다. 지혜는 지혜 수달이고 정현은 정현 수달이다. 영원은 영원 수달이다. 지혜와 정현은 세상에 쓸모가 다해 버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부족한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주며 살아갔다.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엉켜있는 수달의 모습은 서로의 손을 잡고 크고 작은 고난을 버텨내는 우리와 닮아있다. 마지막 영원 수달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행히 영원의 동화 <작은발톱수달과 구슬>은 진행형으로 끝이 난다. 별보다 더 화려하게 빛을 발하는 구슬이 비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다. 범람하는 하천이 토해내는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영원도 영원 수달도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이 동화가 삶을 치유하는 모험담이 되었기를 바라게 된다.
작가의 말 - 배해률
살아남았구나, 되뇌었다. 살아남았음을 감각하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삶이지, 되물었다.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도 되물었다. 그 와중에도 희곡을 쓰고 있었고, 그래서 희곡을 쓰나 싶었고, 그러니까 희곡을 써야겠다고, 되씹었다. 그럼에도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이따금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이따금 너무나도 멀리에서,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따금 아주 익숙한 곳에서 마주했다. 지켜보려 했다. 정말 지켜보려고만 했다. 하지만 구슬! 그 안에 구슬을 두고 싶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계를 우리 곁에 두고 싶었다. 이건 살아남았음을 감각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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