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주네 '엘르'

clint 2021. 5. 5. 16:01

 

 

 

장 주네의 엘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 작품들과 구분된다. 하나는 극의 주인공이 사회 소외계층이 아닌 권위자 교황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교황 스스로 성스러운 이면에 숨겨진,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자신의 공허한 실체에 조소를 보낸다는 것이다. 연극 엘르는 신성한 종교적 지도자로서 교황과 일상적인 보통 인간으로서의 교황, 그 양면성에 대한 드라마다. 이 상반된 이미지의 극적 효과는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한다.

희극의 원천은 슬랩스틱과 언어유희에서 벗어난 극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상반된 속성들의 공존과 충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대장치와 교황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 스타일을 작품의 키 포인트로 삼아 본다면 더욱 작품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교황이라는 한 인간의 아이러니컬한 비극적 존재 양식과 그것의 희극적인 무대연출, 고상한 시어와 저속한 언어라는 상반되는 요소들의 조화로 이루어진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작품이 바로 엘르.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 에서 '광인들의 교황'으로 뽑히는 콰지모도를 연상시키는 주네가 가장 성스러운 존재 교황을 전면에 다루는 작품을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작품 속 교황은 여성적 존재 그것도 아드레날린 넘치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서 핀업-걸처럼 묘사된다제목 엘르는 영어의 She에 해당하는 3인칭 여성대명사로 프랑스어로 교황은 le Pape로 남성명사이지만 그 호칭인 성하(聖下)에 해당하는 la Saintet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엘르'로 부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여성에겐 신부조차 불허하는 가톨릭교에서 교황을 여성화하는 것은 대단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주네 사후 4년 후인 1990년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초연됐을 때 역시 만만치 않은 부조리작가 이오네스코가 객석에서 뛰쳐나갈 정도였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니까.

 

 

 

내용은 새로 선출된 교황의 초상사진을 찍기 위해 바티칸 궁을 찾은 사진사가 오랜 기다림 끝에 교황을 만나지만 여성처럼 분칠을 하고 망사스타킹과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교황을 만나 외설적 포즈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공연에서 교황의 역할은 여배우가 맡아 사진사가 성스런 자세를 요구할 때마다 요염한 자세로 촬영에 응한다. 사실 시각적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이지만 교황의 장황한 독백을 듣고 있노라면 내용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교황은 자신의 포즈가 그토록 괴상망측할 수밖에 없는 비통함을 다섯 곡의 장황한 설교로 풀어낸다. 그것은 목동이었던 자신이 신성한 존재로서 교황을 꿈꿨지만 막상 교황이 되고부터는 완전히 신성한 존재인 교황을 연기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신성한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근엄한 표정으로 4개 대륙에서 1500만장의 사진이란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교황은 그 존재양식에 있어서 남성들의 성적 환상을 관능적 포즈의 사진으로 충족시켜주는 핀업 걸, 더 나아가 포르노스타와 다를 바 없다는 형식논리가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흰 법복을 입고 1500만장의 사진으로 존재하는 교황은 쓴 커피를 마실 때 사람들이 집어넣는 흰 각설탕과 같은 존재로 설명된다.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는 오늘날 현실을 이보다 강렬하게 풍자하는 것이 있을까. 물론 현실의 교황이 연극 속 교황처럼 철저히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직책 또는 '캐릭터'에 부여하는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실체가 소외당하는 사람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교황만한 메타포는 또 없을 것이다연극이 끝날 무렵 다시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이 펼쳐집니다. 극중 내내 교황의 사진을 찍은 사진사 역시 사진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존재였고 실제 사진사는 따로 있었다는 반전이다. 그렇다.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것은 비단 교황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 아닌가. 셀카 사진을 찍으면서도 얼굴이 작게 나오게 하는 '얼짱 각도'를 유지하고 블로그 사진에도 '뽀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라고 도발적 포즈로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포르노 스타와 무엇이 크게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