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민정 '만파식적 도난 사건의 전말'

clint 2021. 2. 10. 20:00

 

 

만파식적 설화는 삼국유사2권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32권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다. ‘만파식적은 신라 신문왕 2년에 용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들었다는 전설의 피리이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며 질병이 낫고 또 가뭄 때는 비가 내리며 장마 때에는 비가 그치는 등 바람을 재우고 파도를 가라앉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왕은 이 피리를 천존고에 모시고 그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국가의 보물로서 소중히 여겼다. 삼국유사에는 효소대왕 때 화랑 부례랑의 실종으로 만파식적을 도난당했고 이후 부례랑의 귀환으로 다시 찾게 되었지만 다음 원성왕 때까지 보관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쓰여 있다.

 

 

 

 

<만파식적 도난 사건의 전말>은 만파식적 설화를 바탕으로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판타지를 가미해 <해무>의 작가 김민정이 새롭게 쓴 희곡이다.

 

<만파식적 도난 사건의 전말>에서 대금 연주자인 주인공 길강은 우연한 기회에 만파식적을 불게 되어 신라시대와 현대를 넘나들게 된다.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만파식적은 오로지 권력과 탐욕의 상징일 뿐이다. 인간들은 얻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하다 보니 피리가 가지고 있는 조화로운 소리와 평화를 가져온다는 치세의 기능을 망각하고 목적을 상실한 채 질주한다. 이 작품은 권력에 무력한 무자비한 인간들과 그 권력을 견제하려는 평범한 소시민의 정의가 대립하는 등 복합적인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 있다.

 

 

 

 

나라의 어지러운 재앙을 막고 물이 흐르며 꽃이 피는 화합의 세상을 만든다는 전설의 만파식적을 손에 쥐게 된 이는 바람둥이 길강이다. 시립관현악단 단원이었으나 스캔들로 쫓겨나게 된 길강은 박물관 천존고에서 피리를 불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피리를 불기 위해 갔으니 피리를 불렀을 뿐인데 박물관이 무너져 내리고 시간은 신라시대로 바뀌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길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시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지만, 만파식적을 갖기 위해 검을 들고 기꺼이 피를 보는 과거의 어두운 손이 현재까지 뻗어 암흑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왕은 만파식적을 이용해 더욱 강력한 왕권을 이어가려 하며, 그 만파식적을 탐내는 신하는 등을 보인다. 만파식적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국선은 뜻은 좋으나 혁명의 중심에서 더욱 많은 피를 부른다. 인물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12역을 연기하므로 추악한 이기심의 여전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박물관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관장부터 진실보다 특종이 중요한 게으른 언론들까지 점입가경이다. 신기한 능력을 가진 만파식적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주요 도구로 보지 않고 소리를 내는 악기로 보는 것은 길강 뿐이다. 그는 악기는 음악이며 음악은 위로라는 것을, 음악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것을 알고 고군분투하지만 원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 게다가 일개 시민일 뿐이다예술이 예술 그 자체로 존중받은 때 빛나는 것을 아는 길강은 만파식적을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가만히 있으므로 이용당하나 느린 걸음과 낙천적 표정에는 핵심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다. 이는 대중이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포지션과 같다. 길강은 누군가의 욕심을 위해 연주하기를 거부한다. 재밌는 것은 어느 순간 만파식적 스스로가 소리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연극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할 수 있는 만파식적이 침묵하는 장면은 진짜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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