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진용석 '레알 솔루트'

clint 2020. 8. 8. 10:17

 

 

고등학교 동창인 형석과 민준 그리고 달구는 올 해로 서른 살이 된 암울한 청춘들이다.

형석은 1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주류백화점을 물려받았으나 길 건너편에 대기업이 거대자본으로 골목상권에 비집고 들어온 종합 주류 할인 창고에 수완에서도 물량에서도 밀려 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무리하게 대출까지 받아서 종합 주류 할인 창고의 미끼 상품전략을 흉내 내보았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여 가게의 고급술들에는 모두 압류딱지가 붙은 상태이다. 셋 중 유일한 기혼자인 달구는 형석의 가게 건물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 달구는 화장실에서 변을 보며 노래하는 걸 좋아하지만 아내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형석의 가게 화장실을 자주 사용한다. 달구에게는 연년생인 네 명의 아이가 있는데 아내는 한 명을 더 낳자고 종용하고 있다. 지금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에 부친 달구는 아내의 요구를 피하느라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민준은 어플 개발로 한 몫을 챙기려는 IT 꿈나무이다. 민준이 개발하는 어플은 항상 기발하긴 하지만 투자자의 마음을 끌기에는 한끗이 부족하다. 그러던 중 민준이 대박이라고 심혈을 기울인 어플이 투자자를 못 찾자 그만 건달형제들이 운영하는 사채 돈에 손을 대고 만다. 하지만 출시한 어플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민준은 건달형제들에게 콩팥을 적출당할 위기에 봉착한다.

한 달 전 형석과 민준은 크게 싸웠다. 형석이 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출받은 돈을 민준이 자신의 어플 개발비에 투자하라고 종용하다가 크게 다투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달구는 어딘가에서 구한 레알 솔루트라는 몹시 좋은 술로 이들을 화해시킬 자리를 마련하는데......

 

 

 

 

레알 솔루트는 작가의 설명대로 욕설과 비속어가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시간성과 함께 소리성(Lautlichkeit)을 부각시킨다. 욕은 문자적인 의미 생산방식이 아닌, 음성의 질감과 공간성에 주로 관여하는 소리의 몸성과 그 방식을 따른다. 욕의 질감, 강도, 그리고 발화자 - 몸에 체화된 상태에 의해 그 의미의 크기와 범위가 변한다. 작품에서 인물들의 욕설의 세기는 거대 서사와 욕망 체계에 대한 저항의 크기와 비례하고, 일반 개인의 심리적 투쟁의 상태를 확인시키는 한 가지 기준이 된다. 고정된 사회구조와 자본주의 욕망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시선은 끊임없이 등장하는 욕설 이외에도 변기, , , 고장 난 라디오, 손뜨개 옷, 죽방멸치, 노동자의 낮은 급여 등과 같은 소재에 관련된 텍스트의 발화 과정에서 적확히 드러난다. 욕설의 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동시대 일상의 인간에 대한 윤리적 감각은 예민하게 살아난다. 이때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더럽고’ ‘하찮고’ ‘낮은것들은 세련된 것으로 포장된 자본주의적 욕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키는 극적 장치가 된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윤리적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일종의 역설적인 감각을 발생시킨다. 심지어 작가는 욕설이나 비속어의 문법적인 표기마저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욕은 언어의 논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으로는, 비판적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레알 솔루트에 내재된 욕의 수행적 감각은 텍스트의 물질성을 발생시키고, 희곡-텍스트가 사건으로 전환될 수 있는 비가시적인 기회를 연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작가의 글

이 희곡은 전적으로 스크루볼 코미디를 지향하며 썼다. 스크루볼 코미디는 1930-40년대 미국 영화에서 대유행하던 장르로 주인공들의 빠르고 재치 넘치는 대사 주고받기가 극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영어로 된 고전 코미디 영화들을 보면서 언제나 웃음이 한 박자 늦게 터지는 경험을 했다. 목적어가 뒤에 오는 영어의 어순 때문에 코미디의 타격 포인트가 한 발 늦는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되었다. 때문에 때로는 목적어가 주어보다 앞서는 우리말의 어순이 이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에는 제격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와 같은 극작을 결심한 데에는 번역극들이 코미디문화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연극 분위기도 한몫 하였다. 번역가들도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 영어적인 표현이나 그 나라만의 역사적 상식을 기반으로 한 농담을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았으리라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우리의 현재를 우리의 말과 정서로 웃어낼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농담은 좋아하지만, 코미디라는 장르의 희곡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는 미지수였다. 고민 끝에 스크루볼이라는 장르를 찾아냈고 적용해보았다. 우리말의 호흡과 리듬이 영어보다 빠르다는 확신과, 목적어의 위치 덕분에 더 중의적이고 많은 충위의 농담을 자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몸짓이나 타이밍으로 농담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관객의 이해보다 속도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다층적이고 직관적인 웃음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의 암전도, 심지어 장이나 막의 구분 없이 일단 시작되고 나면 결말까지 달려가는 극이기 때문에, 사족일 수 있겠지만 메트로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박자를 몇몇 부분 표시해 놓았다. 음악에서 두루 사용하는 bpm라는 단위를 사용하였다. 공연 목적이 아닌 읽기 중에도 표시된 박자로 메트로놈을 설정하며 읽으면 공연 현장 같은 박진감이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으로 만드는 과정 중에는 무시하고 연출 본인만의 박자를 만들어도 무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