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보부상의 행적을 바탕으로하여 그들의 민족정기를 수호하려는 의지와 생존의 욕구 사이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설득력있게 다루었다. 특히 파격적인 구성과 웅대한 작가적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줄거리
나이 여든에 이르른 개성 갑부의 후예 김종 노인은 자손들을 이끌고 젊은 시절 절망끝에 폐지해 버렸던 지킴이 제사를 다시 일으켜 모신다. 연극은 이 제사의 진행과 함께 김종 노인의 회상으로 과거, 상고시대, 현재의 장면들이 뒤섞이며 진행된다. 개성 갑부 김씨 문중에는 세상이 암울할 때면 까닭없이 집안 산소가 파헤쳐지는 매굿 귀신의 전설과 함께 삼십대 이상 종손에서 종손에게로 은밀하게 내력이 전해져 온 지킴이 제사의 수수께끼가 있다. 상고시대의 윤리의 척도이며 무기이며 의술용 도구이기도 했던 칼을 들고 온갖 전란, 질병,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켜왔던 무사계급 지킴이의 전통과 기백을 변천하는 역사속에서 차츰 돈이라는 칼을 들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웃과 내 땅의 맥을 지켜 대물린 만석꾼이 어떤 시대에도 당당하고 의연했던 개성 갑부의 김씨 문중에 내력을 만든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나라를 빼앗긴 충격으로 집안의 내력에 마저 회의를 품고 시류에 합리적으로 순응해 온 젊은 김종은 친일파로써의 득세와 오욕 반동 지주로 몰려 공산당에 아들을 잃은 타격, 그로 인한 아내의 자살, 부정 축재자로서 4.19의 와중에서 종손을 잃은 고통 등을 겪으며 만신창이의 삶을 보낸다. 이제 나이 여든 임종을 바라보며 남은 자손들이 다시 의지할 가치 기준없이 표류하며 불행해지는 것을 보다가 독립운동 끝에 옥사했던 숙부의 산소가 또 수수께끼같은 매구를 당하자 집안의 전통인 지킴이 제사를 일으켜 다시 대물려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었어도 자손은 자손, 난세를 만나면 결국 아버지, 할아버지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끝내며 김종은 호소한다. 스스로 모멸하여 내던져 버렸던 저 오랜 우리의 도덕과 윤리의식 지킴이의 칼을 자손들에게 돌려 달라고.
개화기 보부상의 한 가족의 명성을 통해서 민족정기와 생존의 갈등을 발의 극 형식으로 가져간 「지킴이」는 여류작가답지 않게 스케일이 컸고 연출의 힘 역시 돋보였다. 이 작품은 지난 봄에 극단 창립공연으로 한번 무대에 올려졌던 것이다. 특히 전통예술을 현대의 연기방식에 접목시켰음에도 별다른 껄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한 것은 연출가의 절제력에서 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송용태가 연극 무대에서는 신진임에도 매우 중후한 연기력을 보여줌으로써 장래를 기대케 했다
정복근(鄭福根) 원작으로, 그녀의 사극 <검은새>에 이어지는, 전승된 비법의 드러냄 같은 미묘한 작품인데, 그 ‘묘하다’라는 표현에는 그것이 정통사극이 아니면서 그렇다고 야담이라고 밀쳐 버릴 수도 없는, 너무나 뚜렷한 주제 설정이 인상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대한민국연극제 제4회 진출 캐리어가 말하듯 정복근의 작품세계는 나름대로의 특이한 개성이 있다. 그것이 특히 역사물인 경우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집단의 집념 같은 것으로 설정된다. <검은새>에서는 이징옥의 주변에 단군 이래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유랑예인 형식으로 잇는 집단과 그들의 정신이 있었다. <지킴이>에는 그 집단의식이 가계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정리된 반면 마을에 무덤이 파헤쳐지는 매구 소동이 난다는 식으로 설화성은 거의 야담조에 이른다. 이 야담조가 정복근 희곡의 재미일는지 모른다. 작가로서는 불만일지 몰라도 재미없는 희곡에 식상해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작품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그립다. 그럴 때 그녀의 작품들은 잘 짜여진 구성에다가 성격 부여뿐만 아니라 그 위에 또 하나의 재미, 곧 불가사의하고 그래서 초월적인 ‘오컬트’의 권능을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각박한 현실감의 재미없음에 대한 재미있음의 본체가 된다. 그런 까닭에 정복근의 역사물은 정통사극이 아니다. 그것은 탈역사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야담조의 신화·전설이 리얼한 역사 속에 점철되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지킴이>의 시간이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의 시간은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현대로 왔다가 묘청•동학운동 등으로 서사화한다. 적을 죽이는 무예가 제의에 바쳐졌던 무용과 일치하는 황당무계한 설정도 그것이 야담조의 설정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설정은 나쁘게 말해서 야담조이고 좋게 말하면 신화·전설적이다. 신화·전설적이므로 시간의 가변성과 함께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그 가변의 능력은 바로 연극적 가변성과 일치해서 연극다운 연극을 만들어낼 소지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킴이 정신-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그것은 이미 말한 대로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초월적인 비법의 전승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무용의 코스몰로지였다가 공격과 방어의 무예로 바뀌고 그 무예가 오늘에 와서는 그대로 양날의 칼과도 같은 돈이 된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못해 송곳처럼 꽂혀 오는 비판의 날이 된다. 상고 때는 신을 즐겁게 하고 공동체를 지키게 하던 춤의 정신이 무예가 되어 적을 막고 공동체를 지키는 화랑도가 되었고, 묘청·동학운동의 기간이 되었다가 산업사회의 금전만능주의 치하에서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돈으로 설정된다는, 이런 발상은 역사물 주제를 아주 참신한 현대극 의식으로 표변시킨다. 따라서 지난 과거를 회상하다가 느닷없이 오늘의 우리를 찌르는 이 의표의 창날은 분명히 범상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지킴이의 본령인 칼의 호신법이 느닷없이 돈으로 옮겨 앉느냐고 따지는 따위의 범용한 물음은 던질 것이 못 된다. 왜 하필이면 어수선한 시국과 관련되어 산소가 파헤쳐지는 매굿귀신 전설이 결합되어야 하느냐를 따진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모두 연극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가변의 예술세계이기 때문에 온갖 불합리한 것도 덮일 수 있다. 그러나 개성 갑부의 후예인 김종 노인(송용태)-그의 연기는 이번 공연의 압권이다-이 30대 이상이나 전승되어 내려온 지킴이의 전통을 이재(理財)의 지킴이 정신으로 바꾸는 까닭이 하필이면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뺏긴 그 절대절명의 시기에 있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친일파로서 욕된 삶을 살아 남았던 그의 자기변명이 시류에 합리적으로 순응한다는 단순한 현실주의자적 계산에 있다는 사실은 수긍되지 않는다. 그런 계산이라면 반동분자로 몰려 공산당에게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자살하게 하고 부정축재자로 몰리고 4·19의 와중에 정의로운 종손을 잃는 고통을 겪다가 난데없이 또 한번 수수께끼 같은 매구를 당하자 지킴이 제사를 부활시킨다는 전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끝까지 지킴이 제사를 거부해야 지킴이 정신을 지키는 것이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합리적 발상법이고 합리적 논리이다. 그러나 지킴이라는 전승비법의 고수 같은,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 있을 것 같지도 않는 고담(古談)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나마 가능했던 까닭은 우리 속에 잠재적으로 그런 숨은 내력이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 탓이다. 그런 소망을 문학화하는 작업이 예술적 능력이라는 의미에서 정복근의 극중 인물들은 생동적이고 김종 노인의 의식세계를 오르내리는 역사의 파노라마와 가계를 이어 내리는 집념의 흔적은 웅대하기조차 하다. 그리하여 사적인 한 집안의 내력이 역사라는 공적인 궤적에 실림으로써 4대에 걸쳐 끊겼던 김종 노인의 제사 복원은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주관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국수주의적 전통 복귀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이런 전통 복귀의 흐름에는 전통의 현대화를 작업 목표로 삼아왔던 극단 민예의 주도 멤버 손진책으로 봐서는 낯익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연출과 작가가 극단 미추 창단 공연에서 잘 만난 셈이다. 손진책 연출로 봐서는 그의 마당놀이 스타일이 원작의 섬세하고 끈질긴 연대기식 전개로 정비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비인가, 양식화인가, 아니면 마당놀이의 새로운 전개양식인가는 단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연출 손진책으로 봐서는 분명히 절제된 제의성의 연극으로 해서 다른 일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다. 주제인 계율의 은밀한 내력과 전승, 무예의 자본주의적 경제 관념의 확대, 그리고 개인과 가계와 공동체 집단의 잠재의식을 시간의 역류 속에서 한국 혹은 동양적 문맥으로 그려내는 작가세계, 현대 연극적 기법으로 이를 맞물리는 연출세계, 어쩌면 엇물리기도 하고 그런 한편 삐걱거리며 공명하면서 총체적인 공연의 장르 상호간의 공시적(共時的) 작용으로 현대적이면서 제의극적인 세계를 꾸며내는 작가와 연출은 상고시대의 서사시이자 현대의 서사극으로써 우리의 의식과 정신과 마음에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공연 전편을 통해서 끝까지 불가사의한 것은 무예의 환금적(換金的) 가변성이다. 고대의 지킴이 정신이 칼로 표현되었다면 현대의 지킴이가 돈이라는 사실은 확실한데 칼과 돈을 전승된 비법으로 바꿔치기 하는 이 제의극의 서사적 양식은 다채로운 만큼 분명하지 않다. 그 점에 있어서 신화•전설적 야담조의 가변성이 용납된다면 설명 불가능의 비합리적 요소마저도 신비와 불가사의의 초월적 논리로 호도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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