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국,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영화반 CA 두 번째 시간. 세계사 교사 이종민은 학생들에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감상과제를 내주었지만, 대부분이 해오지 않는다. 과제를 해온 일부 학생들도 오래되고 진부한 영화를 왜 봐야 하느냐며 불만을 토로한다.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중 히틀러, 독일,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하자 더욱 산만해지는 학생들. 수업 시간은 엉망이 되고, 이 선생은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갑자기 학생들에게 수업이 아닌 ‘게임’을 제안하는 이 선생. 아이들은 수업이 아닌 ‘게임’이라는 제안에 급격히 관심을 보이는데…….
파란나라’는 EBS 다큐멘터리 ‘지식채널e-환상적인 실험’ 편에 소개된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큐벌리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 ‘제3의 물결(The Third Wave)’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김수정 연출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이유를 ‘사람들은 왜 대부분 집단 내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집단의 규율 아래 통제되고 싶어 하는가’에 주목했으며, ‘파란나라’에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2016년의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그들이 어떻게 집단주의를 경험해 가는지 보여준다.
‘파란나라’는 통제가 어려운 교실을 보여주고, 학생들을 통솔할 수 없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조퇴를 조건으로 내세운 게임으로 시작된다. ‘훈련을 통한, 공동체를 통한, 실천을 통한 힘의 집결’이라는 구호 아래,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는 파란나라를 만들고자 시작된 ‘파란혁명’은 순식간에 교실을 넘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간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교실임에도 학생들은 집단의 힘이 곧 자신의 힘으로 착각해 집단을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우선시한다. 우리 사회 속에 숨어있는 이와 같은 집단주의를 극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학생에게 흰색 상의를 입고 오길 종용하는 안내문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관객들은 ‘파란나라’에서 강조하는 집단주의, 불평등, 개인의 자유에 대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며, 작품 속 실험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닮아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관객과 논리적으로 소통하기보다는 몸이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매체로 감각적으로 다가서는 김수정과 극단 신세계는 작품마다 거칠고 도발적인 연극 문법으로 현실사회의 불편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해오며,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상징화해 현대사회의 강요된 질서와 집단 세뇌에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작품들을 주로 선보여 왔다. 이번 무대를 통해 올해 남산예술센터 시즌 프로그램의 최연소 연출가인 김수정의 장차 행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라고 평을 했다.
학생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기간제 선생과 CA 영화반 학생들이 꿈꾼 건 말 그대로 파란나라였다.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 파란 나라를 보았니 울타리가 없는 나라" 말이다. 특히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미명은 불량학생, 가난한 학생, 부자지만 힘이 없는 학생, 왕따 학생 심지어 모범생마저 끌어들인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한 건 전체주의라는 주문에 있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지만,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집단주의 앞에 속절없다. 집단의 힘이 곧 자신의 힘이며, 이 집단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으로 세운 왕국은 그처럼 굳건하다. 흰색 티셔츠와 파란 네임 카드는 이 울타리의 보증 수표다. 이들이 '파란! 파란! 파란'이라고 맹목적으로 구호를 외치는 순간은 어떤 액션 영화보다 폭력적이다. 그 위로 히틀러와 나치스 영상이 겹쳐지는 순간은 어떤 공포영화보다 섬뜩함을 선사한다. 독일 감독 데니스 간젤의 영화 '디 벨레(Die Welle)'(2008) 역시 같은 실험을 바탕으로 파시즘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수작인데, 갇혀진 극장에서 압박해오는 '파란나라'의 물리적인 충격 역시 만만치 않다. 어느새 '우리 안의 파시즘', 즉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된 집단주의 질서를 돌아보게 만든다.
김수정(33, 극단 신세계 대표)
혜화동1번지 6기 동인으로, 지난 2014년 서울연극센터 유망예술지원사업 <뉴스테이지>에 선정됐으며, 2015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연출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페리클레스>, <연변엄마>, <빨간시>, <조치원 해문이> 등의 작품에서 안무가로 활동해왔고, <안전가족>, <인간동물원초>, <그러므로 포르노>, <멋진 신세계>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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