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스트린드베리 '부활절'

clint 2016. 11. 13. 11:50

 

 

 

 

 

 

 

1901년 작
헤이스트 가문의 외아들 엘리스는 고등학교의 외국어 교사로 지금 사면초가에 놓여있다. 아버지가 신탁금 횡령혐의로 감옥에 수감되는 바람에 가문의 명예는 바닥으로 추락해 있고 가정 경제 형편은 파산 직전이다. 여동생 엘레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고 학급에서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애제자 베냐민은 라틴어 과목시험에 실패해서 일년간 유급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수제자였던 대학원생 페테르에게는 논문을 도용 당하는 일이 생기고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채권자 린드키스트로부터는 공포에 가까운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때마침 엘레나가 정신병원으로부터 며칠간의 조건부 귀가 허락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나 꽃가게에서 오빠에게 선물로 가져온 수선화 때문에 도둑으로 오인 받는 소동이 일어나고, 아내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배반했던 페테르와 음악회에 감으로써 엘리스를 절망하게 한다.
한편 집으로 쳐들어온 린드키스트는 빚을 당장 갚으라고 압박하고…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에 엘리스는 모든 것이 자기만 모르게 짜놓은 연극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어서 린드키스트는 짤막한 과거사를 고백한다. 가난뱅이 청년으로 무작정 수도 스톡홀름에 올라와 위기상황을 맞았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엘리스의 부친이었다는 것.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그는 채권을 포기하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선언하고 떠난다. 오해와 증오, 빚, 맹목적인 자존심 때문에 겪은 고통 등 모든 먹구름이 걷히고 불운을 상징하는 자, 나무 숲을 지나 헤이스트 가족은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다.  

 

 

 

 

스웨덴의 극작가인 스트린드베리 (Johann August Strindberg 1849 ~ 1912). 그의 부친은 몰락해 버린 상인이었고 모친은 그 집 하녀였다. 아홉 명의 형제와 함께 그의 소년기는 늘 배고픔과의 싸움이었고 방황이었다. 13세에 모친이 사망했고 계모가 들어왔지만 온갖 박해를 당하여 18세에 가출했다. 그는 극작가, 신문 기자, 소설가, 도서관 직원 등 한 인간이 이렇게 많은 직업을 갖고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가 경탄할 만큼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빈곤과 맞섰다. 스트린드베리의 결혼생활도 그리 순탄치 않았다. 26세에 결혼했지만 3회에 걸친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작품인 “Till Damascus“ 를 비롯하여 “죽음의 무도” “유령 소나타“ 등 56편의 희곡, 19편의 소설, 자서전 11권, 과학, 의학 17권 등을 남기고 1912년 63세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서 ‘내가 조금만 더 유복했더라면 보다 많은 글을 남겼을 텐데..’ 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삶의 무게에 눌려 맘껏 상상할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는 없었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거꾸로 그의 고된 인생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감은 끊임없이 자극 받고 이것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파산 직전에 놓인 헤이스트 가문의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아버지가 신탁금 횡령혐의로 감옥에 수감되면서 사면초가에 놓이게 된 헤이스트 가문의 구성원들이 서로간 이해와 인내를 통해 시련을 극복해나가는 내용이다. 온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내면의 극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 중에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한다. 그리고 약해지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인다. “그런게 부부이고 가족이 아니겠냐”고. 부활절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작품은 가족애와 함께 고난을 통한 내면적 성숙을 경험하는 한 가족의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가지 사건이 좌충우돌 벌어지는 ‘사흘’은 부활의 광명이 비취기 전, 캄캄한 흑암의 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주제는 “성금요일에 누구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유익하다”, “기독교인에게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 “고통은 축복의 전주곡이다” 등 배우들의 대사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계속되는 불운에 “왜 모든 일이 한꺼번에 터지는 거지”라며 고통스러워 하는 외아들 엘리스와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우린 서로 사랑해야 돼”라고 말하는 여동생 엘레나처럼, 고통을 상징하는 자작나무와 고통을 흡수하는 꽃 수선화는 각각 무대 위에서 소품 이상의 역할을 한다. 가족애라는 한정된 소재와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북유럽 작가의 작품이란 점에서 선뜻발길이 옮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소재주의 작품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현실성이 뛰어난 가정드라마다. 고통과 갈등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이 함께 교감하는 가운데 희망의 메시지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은 거대한 사건이나 상황이 휘몰아 치는 이른바 소재주의 작품이 아니라 현실성이 뛰어난 가정 드라마다. 스트린드베리의 숨겨져있던 영롱한 보석에 비유될 수 있다. 여러가지 난제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한 소시민 가족이 겪는 삼일 간의 사건을 치밀한 심리묘사로 정밀하게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며 시련을 통과하면서 얻는 삶의 지혜와 가족애가 주는 감동, 극적인 반전, 유머 등을 두루 갖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