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독한 수전노 스가나렐은 친구인 제로니모를 만나 2세를 얻고 싶다며 결혼 상담을 한다. 제로니모는 스가나렐이 나이가 50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만, 스가나렐은 이미 장인에게 허락도 얻고 오늘밤에 결혼하기로 한 사실을 알려준다.
'강제 결혼’에서 돈 많은 자린고비 영감 스가나렐은 젊고 예쁜 도리메에느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도리메에느는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여인. 그녀는 결혼 후에도 젊고 잘생긴 리까스트와의 만남을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려 하니 왠지 마음이 불편한 스가나렐이다.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주변 사람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 박식한 학자인 빵그라스와 말휘리우스, 미래를 점치는 집시들에게 자문한다. 과연 스가나렐은 얻고자 하는 답을 찾게 될까? 도리메에느와의 결혼은 어떻게 될까?

몰리에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여러 신화가 존재하지만, 20세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별로 많지 않다. 몰리에르의 본명은 쟝-바티스트 포클렝(Jean-Baptiste Poquelin)으로, 1622년 1월 15일 궁정 실래장식업자인 쟝 포클렝의 아들로 태어났다. 몰리에르는 1633년경부터 제쥐이트계인 콜래쥬 드 클레르몽(현재의 리세 르 그랑)이라는 파리 귀족이나 상류층 부르주아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 들어가 고전과 철학등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당시 몰리에르는 연극인으로서의 어떠한 성향도 보이지 않았으며, '타르튀프'나 '동 쥐앙'이 보이는 자유주의 작가로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콜레쥬 드 클레르몽 재학 시절, 콩티(Conti)공과도 사귀었고, 철학자 폴 가상디(Paul Gassendi)의 수업을 들었으며, 베르니에와 시나로 드 베르쥬락과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1642년에는 오를레앙에서 법학사자격을 얻었다. 몰리에를가 연극에 입문하게 된 일화는 많지만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몰리에르가 21세 때 갑자기 연극으로 회심한 동기를 어린 시절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연극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연극에 대한 열정은 어린 시절에서 왔다고들 한다.
몰리에르의 외조부는 어린 포클렝을 '오텔 드 부르곤뉴' 극장에 자주 데리고 갔으며, 외주부의 영향으로 당시의 유명한 '세명의 익살꾼'(trois farceyrs)'의 연기에 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을 기회로 몰리에르가 연극에 대한 소명을 확고히 찾았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1643년(21세), 그는 돌연히 궁정 실내장식업자라는 가업과 부유한 부르주아로서의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는, 베자르(Bejart) 가족과 함께 '알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 Theatre)' 극단을 조직하여 연극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는 코르네이유의 비극이 황금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몰리에를가 그보다 3살 연상이며 벌써 배우로서 명성을 떨치던 마들렌느 베자르와 그녀의 가족과 알게 된 시기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포클렝은 마들렌느를 통하여 배우수업을 받았으며, 특히 비극 배우로 입문한 듯하다. 처음에는 '알뤼스트르 테아트르'의 주요 남자배우 중의 하나였던 몰리에를는 후에 단장이 되었으나, 불행이도 이 극단은 20개월밖에 존재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비극으로 성공하고자 했던 몰리에르 극단은 주로 코르네이유의 연극을 공연하였다. 1644년 드디어 포클렝은 '몰리에르'라는 예명을 갖게 되는데, 그는 이 예명을 쓰게 된 이유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 '일뤼스트르 데아트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실패담만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결국에는 재정적인 문제로 파산하기는 하였으나, 한때 대성공을 거둔 시기도 있었으며, 국왕의 삼촌인 가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eans')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일시적인 성공의 이유는 파리의 2대 극장 중의 하나인 '테아드르 뒤 마레(Theatre du Marais)'가 화재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마레'극장이 문을 열자, 몰리에르 극단은 단번에 관객을 잃었다. 가스통 도를레앙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는 몰리에르 극단의 자질이나 상연되는 작품의 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몰리에그는 당시 유명한 극작가들인 트리스탕 레르미트, 마레샬, 뒤 리에의 작품을 구입하여 상연하였다). 다만 당시 비극으로 유명한 기존의 두 극단인 '오텔 드 부르곤뉴'와 '테아트르 뒤 마레'가 이미 파리에서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고, 같은 성격의 레퍼토리를 공연하는 3개의 정규 극단이 경쟁할 만큼의 연극 관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에서는 몰리에르 극단이 끼여들 틈이 없었다. 결국 1645년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한 몰리에르는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보석금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무대의상까지 팔기에 이른 극단은 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단원들은 파리를 떠나 유랑길에 오르게 되었다.

몰리에르는 '일뤼스트르 테아트르'의 파산 후에 베자르 가족과 함께 13년간 지방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되지만, 생각처럼 어려운 시절릉 보낸건 아니었다. 파리를 떠난 그들은 그엔느 총독인 에페르농 공작의 후원을 받으며 프랑스 남서지방에서 명성을 떨치던 뒤 프렌느(Du Freame)극단에 들어갔다. 1650년 몰리에르는 뒤 프렌느 극단의 지휘권을 맡게 되었고, 1647년에는 랑그독 총독인 오비주 백작(comte d'Aubijoux)의 초청으로 랑그독 지방에 도착하였다. 자유주의자이며 진정한 문예 옹호자인 오비쥬 백작은 랑그독 지방의 연례 축제 때마다 몰리에르 극단을 불렀으며, 막대한 상금을 하사하였다. 1653년 콩데 가의 막내이며 왕국의 제4인자인 콩티 공이 프롱드 난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오비주백작에게로 피신하였는데, 이번에는 그가 몰리에르 극단의 후원자가 되어 극단에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허락하였다. 콩티공의 후원 아래, 이들은 리용에서의 공연을 제외하고는 거의 랑그독 지방에 머물었다. 작가이기 이전에 배우 겸 극단장이었던 몰리에를는 이미 발표된 비극이나 비희극, 소극을 주로 공연하였지만, 필요성에 의해 [우스꽝이의 질투]나 [나는 의사] 같은 소극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1655년에는 현재 보존되어 있는 몰리에르 작품 중 첫 희극인 [덤벙쟁이]가 발표되었고, 1656년에는 두번째 작품 [사랑의 원한]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시절은 1656년 오비주 백작의 갑작스런 죽음과 콩티 공이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콩티 공이 몰리에르 극단에서 자신의 이름 사용권을 금하였고, 오비주 백작의 재정적 후원마저 끊기자 더 이상 랑그독 지방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귀 파르크 (Du Parc)부부와 카트린느 드 브리(Catherine du Brie) 같은 뛰어난 배우를 보유하고 있던 몰리에르는, 13년간의 지방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되돌아올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 준비작은은 코르네이유의 고향인 루앙에서 이루어졌다. 1658년 몰리에르는 루앙에서 다섯 달 동안 머물면서 총독과 코르네이유 앞어서 공연도 하였다. 루앙에서 몰리에르는 여러번 파리를 방문하면서 후원자를 찾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며, 드디어 1658년 13년만에 다시 파리에 입성하였다.
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가 그린 몰리에르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결코 미남은 아니었으나, 35살에 벌써 뛰어난 자질을 보유한 배우의 경지에 올랐다. 천의 목소리와 천의 연기를 자랑하던 훌륭한 배우였던 몰리에르는 뛰어난 연출가인 동시에 배우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극단장이기도 하였다. 비극으로 재능을 인정받고 싶어하던 그는 코르네이유의 [폼페이우스이 죽음]에서 시져역을 연기하였지만, 다변이고 음량이 풍부하지 못하였던 몰리에르의 음성은 그 당시 비극배우로서 요구되는 음성에 적합지 못하였다. 비극을 주도하던 '오텔 드 부르곤뉴' 배우들의 웅장하면서도 과장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발성법과 제스처가 정석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몰리에르의 연기는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오텔 드 부르곤뉴의 배우들에 맞서 자연서럽고 구어에 가까운 신발성법을 제시하였다. 1658년 10월 몰리에르는 루이 14세의 형제인 필립 도를레앙의 후원을 받아 루브르에서 국왕과 궁정인들 앞에서 코르네이우의 [니코메드]를 상연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비극 공연이 별로 국왕의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고 느낀 몰리에르는 프로그램에 없었던 소극 [사랑에 빠진 박가]를 여흥거리로 공연하겠다고 즉석에서 제의하였다.
이 소극의 공연으로 몰리에르는 궁정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차후 희극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이탈리아 극단과 교대로 루브르 근처에 있는 프리 부르봉 에서 공연할 허가를 받았다. 이 극장에서 2년간 머물면서, 몰리에르는 두 미남 배우 라 그랑쥬와 뒤 크라지를 영입하였다.
1658년 11월부터 몰리에를 극단은 프리부르봉 극장에서 몰리에르의 희극작품을 공연하지 않고, 코르네이우의 비극을 연연한 듯하다. 그 이유는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공연하는 이탈리아 극단 때문에 프티 부르봉은 희극 전문 극장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몰리에르가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서 보통의 극단들처럼 인정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리에르의 적대자들은 몰리에르를 비극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프랑스 제1의 익살꾼"으로 몰아부치곤 하였다. 프티 부르봉에서의 초기 시절, 몰리에르는 아직까지 파리에서 확고한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그때는 '마레'극장이 문을 닫고 있는 상태였는데, '일뤼스트를 테아트르'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마레'가 문을열 경우 다시 관객이 줄어들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뤼스트르 테아트르'때의 그 쓰라린 경험은 사디 일어나지 않았다. [웃음거리 재녀들]과 [스가나렐]의 성공은 몰리에르 극단의 위치를 확고히 해주었다. 이 두 소극은 정규 5막 작품 뒤에 여흥으로 제공되는 산문 단막극에 불과하였으나, 그 성곡은 대단하였으며 극단의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프티 부르봉 철거계획으로 극장에서 쫓겨나게 되어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나, 2년 전 리슐리유 추기경이 세운 '팔레 르와이얄' 극장의 사용권을 루이 14세로부터 허락받았다. 1661년 1월 몰리에르 극단은 [사랑의 원한]을 팔레 르와이얄 개관공연으로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이후 몰리에르가 숨을 거둘때까지 이 극장을 떠나지 않았다. 파리 연극계에서 완전히 성공을 거둔 몰리에르는 희극작가로 명성을 다져 나가지만, 결코 비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오텔 드 부르곤뉴'와 경쟁하기 위해 희극작품과 거의 동일한 양의 비극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주 공연보다 여흥거리로 제공되는 소극이 더 관객의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극을 포기하지 못한 몰리에르는 [동 가르시 드나바르]를 발표하였다. 주인공이 죽음에 처한 위험만 없을 뿐 비극 또는 비희극적 분위기를 띤 이 희극은, 이전의 작품에서 얻었던 환호를 얻지 못하고서 공연이 중단되었다. [동 가르시 드 나바르]의 참패 이후로 몰리에르는 비극작가 겸 비극배우로서의 열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희극이 자신의 길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몇 달 후에 발표된 [남편들의 학교]와 [훼방꾼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팔레 르와이얄은 모든 파리인의 만남의 장소가 될 정도였다. 특히 [훼방꾼들]은 연극과 발레를 접목시킨 새로운 장르라는 점에서 몰리에르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662년 2월, 몰리에르는 마들렌느 베자르보다 20살 연하의 여동생인 아르망드 베자르(아르망드는 마들렌드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등에 업고 비극에 다시 한번 도전하였지만 결국 실패를 거두었으며, 한편 코르네이우는 최신 비극 [세르토리우스]를 오텔 드부리곤누에 상영케 하였다. 몰리에르의 비극에 대한 집착과 환상은 [아내들의 학교]의 성공 이후에 완전히 치유되었다. 여자의 교육과 결혼 문제를 제기한 [아내들의 학교]는 5막 운문으로 이루어진 몰리에르의 첫 '대희극'으로 유례없는 성공과 아울러 많은 비판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극작가들로부터는 연극 이론과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받았고, 여자들에게 부도덕한 행위를 조장시켜 신성한 결혼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도덕가들에게 비난받았다. 몰리에르는 [아내들의 학교 비판]과 [베르사이유 즉흥극]으로 그 비난에 응답하였다. 자신의 작품과 더 나아가 희극 자체를 위해 투쟁을 시작한 몰리에르는 비극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희극 옹호자로 변신하였다.
다음해 "마법 섬의 여흥"이라 명명된 베르사이유궁 축제 때, [강제결혼], [엘리드공주], 3막극 [타르튀프]를 초연하였다. [타르튀프]는 독실한 신앙가와 종교인들의 거센 비난을 받은 문제작으로, 파리 극장에서의 공개상연이 금지되는 수난을 당했다. 공연허가를 얻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몰리에르는 [동 쥐앙]을 발표하여 적대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지만, 이 작품 또한 5주 후에 공연 금지를 당하게 되며 그의 살아 생전에 인쇄도 공연도 되지 못하였다. 루이 14세가 몰리에르에게 특별 지원금을 하사하고 '왕립 극단'으로 승격시키면서 지원하였지만, [타르튀프]는 재연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1669년 금지령이 햊되고 2월 5일 팔레르와이얄에서 공개적으로 초연된 [트르튀프]는 몰리에르의 작품 중 최고의 입장수입을 기록한 작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1666년 몰리에르는 자신의 병과 모후인 안도트리슈의 죽음으로 잠시 극장문을 닫아야 했지만, 계속해서 [인간 혐오자]와 [본의 아닌 의사]를 발표하였다. 작가와 배우로서의 성공과 두 차례의 문학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는 부부간의 갈등,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아들의 죽음, 병의 증상 출현 등 개인적인 어려움으로 시련을 겪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5)말련기 : [타르튀프]에서 [상상병 환자]까지
이 시기는 문학논쟁과 도덕논쟁이 끝난 시기로, 몰리에르는 생의 마지막 4년간 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670년 [멋진 연인들]이후에, [스카펭의 간계]와 [에스카르바냐스 백작부인] 같은 소극과 더불어 [여학자들] 같은 대희극을 번갈아 발표하였으며, 코르네이유와 공동으로 [프시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특히 몰리에르의 재능은 발레-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빛을 발하였다. [부르주아 귀족]과 [상상병 환자]를 계기로 발레-희극은 의극의 대사와 춤과 음악이 완벽하게 저화를 이룬 총체적인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불행히도 몰리에르의 육체는 그의 정신적인 젊음을 따라주지 못하였다. 근 30년간의 과로, 직업상의 고민, 불행한 부부생활, 쾌락으로 인하여 그의 육체는 오래전부터 쇠잔해가기 시작하였다. 1673년 2월 10일, 막대한 경비를 들여 제작한 [상상병 환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상병 환자]의 성공은 자신이 연기하는 아르강의 역에 큰 비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몰리에르는 병의증세가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못하고 계속 연기하였다. 2월 17일 4회 공연중 무대에서 쓰러진 그는 몇 시간 후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당시 배우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파문당한 상황에 있었고, 특히 [타프튀프]의 발표로 교회에서 위험 인물로 지목되었던 몰리에르는 종교의식을 받지 못하고 죽었으며, 교회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국왕의 명령에 의해 그이 장례식은 2월 21일과 22일 사이의 한밤중에 두 명의 사제에 의하여 간단한 의식으로 은밀하게 치루어졌다. 몰리에르의 적대자들이 복수를 한 셈이었다. 몰리에르의 죽음 후에, 극단은 중심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텔 드 부르곤뉴'와 합병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성사도지 않았다. 몇 당 후에 '오텔 드 부르곤뉴'로 자리를 옮기지 않은 단원들과 '테아트르 드 마레'의 배우들이 모여 '왕립 극단'이라는 칭호를 드래로 사용하면서, 몰리에르의 작품을 계속 공연하였다. 1680년, 드디어 기존의 모든 극단들이 하나로 병합되어 차후 파리에는 단 하나의 극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몰리에르의 정신을 계승한 파리 유일의 극단 '코메디 프랑세즈'가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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