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앙토냉 아르토 ' 쌍씨(Cenci) 家'

clint 2015. 11. 28. 18:30

 

 

 

이탈리아의 역사적 사실에서 소재를 따온,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 및 그 복수와 형벌을 그린 피비린내 나는 ‘잔혹’의 주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잔혹’이란 흔히 오해하기 쉬운 ‘두개골을 톱질한다’든가, 잘린 두 개의 피투성이 목을 상자에서 꺼내 보이는 것 같은 육체적인 공포가 아니라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잔혹, ‘인간의 삶 그 자체의 잔혹’을 가리킨다. ‘인생’ 또는 ‘필연성’에 결부되는 존재의 고통 그 자체, 즉 존재론적 잔혹이다. 그러기에 아르토는 연극을 식후의 오락과 같은 것, 인생의 단순한 재현으로 보기를 거부하며, “매일 밤 항상 관습에 따라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는” 진짜 현실, 일회성의 것, 즉 배우의 삶 그 자체이며 또한 관객의 삶이기도 한 ‘일종의 사건’으로 생각한다. 반 고흐가 예술을 개인적인 운명과 불가분의 것으로 보았듯이, 아르토 역시 연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현실 그 자체, 삶 그 자체로 본 것이다.
1막
쌍씨왕은 그의 폭정과 독선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반란 신하들을 죽인다. 교황은 쌍씨왕의 살인행위를 사면해주는 대신 쌍씨왕의 영토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 쌍씨는 이에 반대하여 교황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죽여 그 시신을 신하들에게 보이며 교회에 대항하는 악의 구현을 맹세한다.
2막
쌍씨는 악을 구현할 대상으로 그의 딸 뻬아를 소유하길 원한다. 뻬아는 쌍씨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고 루크(쌍씨의 후처)는 자신의 어머니가 쌍씨의 전처였음을 알게 되어 경악한다. 또 다른 젊은 신하들은 까밀로와 만나 쌍씨에게 반란할 것을 모의한다.
3막
결국 뻬아는 쌍씨에게 능욕을 당하고 그녀의 약혼자인 오르시와 함께 쌍씨를 암살할 것을 결심한다. 한편 까밀로는 젊은 신하들에게 쌍씨가 그의 악행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들은, 반란계획은 어쩌면 까밀로의 계략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는다.
4막
쌍씨를 죽이려 하던 뻬아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칼을 떨어뜨리고 결국 쌍씨는 신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까밀로에 의해 체포되고 모두 처형당한다. 처형장에서 뻬아와 루크는 전염병처럼 세상을 휩쓰는 악에 대해 경종의 독백들을 내뱉는다.

 

 

 

이 작품의 아버지상은 한 마디로 억압적이고 전제적이다. 베아트리체의 아버지인 첸치 백작은 단지 악행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저지르는, 매우 병적이고 위험한 성격의 소유자다. 뇌물로써 자신의 죄를 덮어버리려는 비도덕적 모습이 극의 가장 첫 장면부터 제시된다. 그는 곧 이어 자기 아들들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상상조차 힘든 짓도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들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증오해 언어적·육체적·금전적 학대를 거듭한다. 아무래도 가족들을 자기 가학적 취미의 노리개로밖에 여기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이 작품에는 다른 한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바로 교황이다. 베아트리체에게 있어 첸치 백작은 피로 이어진 아버지라면 교황은 곧 정신과 영성을 지배하는 종교적 아버지다. 하지만 교황이라고 해서 첸치 백작보다 별로 나을 것은 없어보인다. 그는 이미 백작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거액의 뇌물을 받았고 교리(敎理)에 어긋나는 데도 불구하고 자식도 둔 모양이며,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고문과 같은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한편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아버지'라면 바로 神이 되어야 하겠지만, 신은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므로(3. 1. 181∼184) 일단 여기서는 다루지 않도록 한다.) 베아트리체는 각각 첸치 백작과 교황에 의해 지배되는, 가정과 교회라는 두 가지 영역에 속한 한 개인이다. 백작과 교황은 각자의 영역에서 남을 정당하게 압도할 수 있는 일종의 가부장권을 행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그 힘을 심각하게 남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베아트리체는 백작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아주 순수하고 선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또한 올곧은 성격이기 때문에 1막의 잔치 장면에서는 많은 손님들 앞에서 아버지의 행동을 나무란다. 하지만 백작은 그에 대한 복수로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고, 그녀는 아버지를 다시는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그녀가 살부(殺父)까지 감행한 것은, 백작으로부터 가족 모두가 벗어나려면 오로지 그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첸치家의 이런 뒤숭숭한 상태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계속돼온 모양이지만, 교황이 제때제때 제동을 걸어주었더라면 양호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교황은 백작과 금전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결탁해 있다. 잔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그는 베아트리체의 행동을 탓하며 백작의 편을 든 것으로 전해진다(2. 2. 27∼40).
이후 교황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4막에 이르러 백작을 잡아들이려고 하지만, 그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베아트리체를 비롯한 용의자들을 모두 사형으로 몰고 간다. 여기서도 그는 자신이 '교회의 아버지'라는 점을 명심해, 사가(私家)에서도 살부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5. 4. 18∼24). 이렇게 베아트리체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은 권력을 남용하는 두 아버지 모두로부터 억압당하고 소외되었던 것이다. '가정의 아버지'가 그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만들어버렸고, '교회의 아버지'는 그 대가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잔혹극의 교본들은 혼란과 충격, 그리고 극심한 고통을 통해 관객 의 마비된 감수성을 일깨워왔다. 이들 스크린에 그대로 노출되는 낭자한 피, 과격한 선정성은 `잔혹극 `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초현실주의자 연극인 앙토냉 아르토의 대표 작 `첸치가(Les Cenci)`를 연상시킨다.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 및 복수와 피비린내 나는 형벌을 `잔혹`이라는 주제로 다룬 연극 `첸치가 `는 국내 무대에도 올라 화제를 모았다.

 

 

 

아르토의 삶과 연극
아르토는 1896년 9월 4일,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났다. 원양어선 선장이자 소 선주였던 아버지의 9남매 중 장남이었지만, 동생들 중 6명은 채 자라지 못하고 죽었다.아르토 역시 다섯 살 때 뇌막염을 겪은 후부터 신경장애 증상에 시달렸다. 19세 때 처음 정신착란 증세가 생긴 이래, 자주 요양원에서 치료받았으며 갖은 후유증에 시달려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아편제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920년 파리로 올라온 후 앙드레 브르통, 아라공, 로제 비트락 등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샤를 뒬랭, 루이 주베 밑에서 배우와 연출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룹에서 탈퇴한 그가 또 다른 초현실주의자 로제 비트락과 함께 1926년 알프레드 자리 극단을 창설했으며, 1935년에는 셸리와 스탕달의 작품을 각색하여 그 자신이 쓴 잔혹극의 대표작 `쌍시 가(家) Les cenci`를 부족한 재정, 불충분한 리허설 등 온갖 역경 아래 무대에 올리지만 실패한다. 이로 인해 다음 해 타라우마라 인디언들과 살면서 환각의 경험을 추구하기 위해 프랑스를 떠나 멕시코로 향한다.
인디언들과 함께 페이오티(peyote)를 먹으며 그들의 제의식에 참여한 아르토는 태양을 숭배하는 춤을 구경했고, 문화의 상징들을 배웠으며,
새로운 삶에 동화되었다고 느끼며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그의 작업에 적용하지는 않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고 무모한 결혼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37년 더블린의 병원에 수용된 이후 9년 간 정신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48년 3월 4일, 이브리 요양소 침대 밑에서 한 짝의 구두를 손에 쥔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연극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수잔 손탁이 아르토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연극과 그 이후를 양분할 정도로 막대하다. 또한 그는 들뢰즈, 데 리다, 푸코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요 개념이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사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앙토냉 아르토 전집」(27권)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