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일상에서 전설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상의 소리와 적막을 깨는 피리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장님은 우리의 안내자이다.
위험에 처한 꿩을 구한 나무꾼과 남편의 복수를 꾀하는 뱀의 이야기인 "꿩과 종소리,
계모 슬하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연이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소년 버들의 이야기인
"연이와 계모", 불행을 막기 위해 3년 동안 수행하는 청년의 이야기 "청년과 스님",
혼령으로나마 자신의 억울함을 풀게 되는 여인의 이야기 "처녀 아랑"의 전설 등의
전설들이 번갈아 가며 눈앞에서 펼쳐진다.
울돈이라는 괴물들과의 전쟁 이야기가 장님의 이야기와 얽히며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장님의 안내로 우리는 전설과 전설의 주인공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연극이 실제 삶과는 결코 같을 수 없음을 안다. 연극 무대 위에서의 사실이 실제와 같지 않음을 안다. 우리가 연극을 보고 실제로 여긴다면, 그것은 연극이 마련한 현실감에 의해 실제로 여겨질 뿐이지 결코 실제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연극이 전적으로 현재의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무대에서는 금새 현재로서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과거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현재가 연속되어질 뿐이다.
이러한 ‘간극’들을 관객이 인식하길 바랬던 작가가 브레히트였고, 간극이 전제된 상황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바로 동양의 연극이었으며, 최우선으로 삼았던 형태가 마이클 커비의 구조주의 연극이다. 무대 위의 사실은 무한히 실제적 사실에 접근해 가는 경향이 있으므로 유사성과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지만, 이질일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사실이 종국에 가서 하나가 되거나 뿌리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수용한다면 “연극은 연극이다.”
우리의 작업은 사실을 다룬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에 대한 실험’이 될 것이다.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진실의 표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며, 어쩌면 연극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실재’를 무대 위에서 그대로 보여주려 애쓰기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실재’를 통해 ‘실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의 목적은 유사성과 현실감에 호소하여 사실을 ‘설명’ 혹은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재현함’이 아니라 ‘현재함’으로써 우리의 작업이 존재하길 원한다. 사실 재현으로의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감각 그 자체의 표현으로써 ‘감각의 조건’들을 보여줄 것이다. ‘광경의 격렬함’이 아니라 ‘감각 상태의 격렬함’을 보여줄 것이다. 아르또가 말했듯이 ‘고함과 숨결을 언어로 만들 수 있도록 할 것’이고, 베이컨이 그랬듯이 ‘공포보다는 외침을 보여줄 것’이다. 다시 스토리를 도입하고, 유사성이라는 것에 즉시 속박되어버릴 가능성이 큰 ‘공포를 위한 공포스러운 장면의 묘사’는 우리에게는 피해야 할 길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리얼리티’는 설명적 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재하는 감각의 진실한 표현’으로 얻어지는 생성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좇았던 사실의 재현으로써가 아니라 현실의 파편들이 가질 수 있는 감각 자체의 힘을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새롭게 추구하는 사실은 거대한 의미와 시공간의 확장이고, 또 하나의 순수한 사실이자, 실제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된 에너지는 극의 스토리와는 무관하게 관객의 신체에 직접 전달되어질 것이다.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지는 ‘리듬, 긴장감, 힘’으로 인해 무대 위에 ‘그렇게 있음’이 스스로 ‘존재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현재함’이다. 이 현재함은 과거와 미래로 부단히 뻗어 나가면서 확장될 것이다.
현재하는 감각 자체로써 표현되는 새로운 개념의 사실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실들에 대한 왜곡이나 변형을 하나의 방법으로 택한다. 사실이 왜곡되고 변형 혹은 과장, 결여의 과정을 직면한 순간 우리가 원하는 에너지의 생성과 감각의 격렬한 상태, 새로운 의미의 확장된 사실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은 재현성보다 표현성이 우위에 서서 다분히 ‘표현적’인 모습을 가질 것이다.
기존의 것을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아주 근원적인 부분으로 접근한다면 어쩌면 같을 수도 있다. “연극은 연극이므로.” 이 선언은 우리가 작업에 임함에 있어서의 원칙임에 더도 덜도 아니다.
구조주의 연극의 ‘시간의 구조화’, ‘기억과 기대’ 그리고 ‘직접적 감정’ 등과 같은 여러 개념들이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은 「전설의 기술」에 임하는 우리로서는 행운일 것이다.


구조주의 선언문 (MANIFESTO OF STRUCTURALISM)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
구조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본질, 모든 행동에는 구조가 있다. 모든 연극, 모든 공연, 모든 발표형태에는 구조가 있다. 구조가 없는 연극이란 있을 수 없다. 구조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구조주의는 모든 예술과 공연에 있어서 구조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구조주의자들의 연극은 공연에 있어서 구조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위치에 놓는다. 구조주의 안에는 구조가 모든 것에 위에 있다.
대부분의 연극에서 구조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사건들을 지탱해 주는 보강제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인물과 장면을 위한 진열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메시지나 노래, 춤의 순간, 시각적인 효과의 보조 역할을 한다.
구조란 무엇인가? 구조주의자가 공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효과는 무엇인가?
웹스터 사전에는 '구조' 란 '전체에 포함된 모든 부분들의 배열 혹은 상호관계' 라고 쓰여있다. 이런 식으로 공연의 총체적인 구조는 공간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우선적으로는 시간을 구조화한다.
전적으로 현재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연극 작품은 드물다. 오직 순간적인 공연만이 ‘지금 여기’에서 끝난다. 다른 모든 발표형태들은 확장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공연이라는 그 자체가 바로 기대이고, 기억과 기대의 혼합이고, (마지막에 가서는)기억일 뿐이다.
구조주의자는 정신이 시간의 연속선상을 따라 어떻게 두 방향 모두에 닿게 되는지를 안다. 그는 기억과 기대에 대해 알며, 그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안다. 그는 기억하는 혹은 기대하는 그 어떤 것-한 구절의 글, 몸짓, 행동, 태도, 사물, 색깔, 모양-도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을 안다. 그는 구조가 정신의 작용으로 인해 명백하게 드러남을 안다.
그렇다면 구조는 언제나 반드시 의식적인 것이어야 하는가? 오로지 정신의 의식적인 수준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구조를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조의 실제에 대한 고양된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안다. 그러나 단지 어떤 그림자, 어떤 메아리, 어떤 징후, 어떤 대답, 어떤 갈등, 어떤 충만함에 대해서만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구조의 작용이 분명히 보여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적인 현상으로써의 구조주의가 철학에서의 구조주의와 같다거나 구조주의 인류학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구조주의는 프로이트나 융 또는 레비스토로스의 무의식 이론과 관계가 없다. 구조주의는 무엇보다도 어떤 구조적인 원칙, 개념, 가설, 사상에 따라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 - 연극과 또 그 밖의 형식 속에서 - 과 연관이 있다.
구조는 순수하게 형식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만 작용하는가, 아니면 감정을 포함하는가?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거부한다. 아니면 분석이나 창조라는 목적이 있을 때만 구분을 짓는다. 구조주의자는 형식적이건 비형식적이건 간에 시간 안에서 배열과 상호연관성이 감정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구조가 매우 구체적이고 미묘한 감정을 창조하고 불러일으키며 그것들과 혼합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들은 반드시 사랑, 미움, 기쁨, 두려움 등과 같은 일상적인 삶의 감정일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구조의 감정들이다.
구조주의자는 구조주의 연극이 다른 어떤 종류의 연극보다 낫다(혹은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이 구조주의자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는 구조주의가 지금은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있으며 이 분야에 있어서 많은 탐구가 요구된다. 공연의 구조가 정신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언젠가는 구조주의의 중요성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이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몰리에르 '초우 속의 파트너' (1) | 2015.11.28 |
|---|---|
| 다리오 포, '오픈 커플' (1) | 2015.11.28 |
| 앙토냉 아르토 ' 쌍씨(Cenci) 家' (1) | 2015.11.28 |
| 조안나 M 그래스 '구리빛 인디언' (1) | 2015.11.28 |
| 프랑소와즈 사강, '더럽혀진 옷' (1) | 201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