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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 '두드리는 신호'

감방의 벽을 두드리는 소리로 의사전달과 신부의 성사(聖事)를 듣고 연락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는 과거 집으로 찾아온 어떤 폴란드인에게 빵 한 조각과 담배 몇 개비를 주었다가 이웃사람의 신고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1년간 옥살이를 한다. 재판에서 죄를 인정하고 이의신청을 포기한다는 서류를 제출하고 그나마 짧게 형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서 그가 겪었던 일 중에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만기 출소 후, 집에서 잘 때에도 들리고, 자신도 두드려서 연락해주는 것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던 부인이 불안해하며 왜 그러느냐고 묻고, 남자는 얘기를 한다. 율리우스라는 반국가사범의 얘기다. 그는 이 감옥에서 신부님을 만나 영세를 받는다. 그것도 여러 번 신부방까지 도달되는데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결되어서 옥중 영세를 ..

외국희곡 2023.10.03

최진아 '그녀를 축복하다'

〈그녀를 축복하다〉(2006)는 짧고 명쾌하고 즐겁다. 비록 〈지고지순〉에서처럼 성이 적나라하게 전면에 노출되지는 않지만 여성의 욕망에 대해 이처럼 솔직하고 생명력 넘치게 쓴 희곡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2006년의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의 공연이 타 공연에 비해 희곡의 매력을 잘 살려준 까닭도 있을 것이다. 줄거리는 삼십 후반의 주부인 선여가 춤 선생과 바람이 나지만 결국 남편 곁에 머문다는 식으로 다소 보수성을 띤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젊고 싱싱한 애인을 향 한 선여의 욕망을 역시 일인칭의 화법으로, 그러나 전작보다 더 낭만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그러나 더 상큼하고 발랄하게 그려낸다. 그 중 백미는 선여가 남편과 애인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자리 배치하는 장면과, 남편과 애인, 그..

한국희곡 2023.10.03

외젠 라비슈 '페리숑 씨의 여행'

19세기 초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통제되었던 대다수의 극장들이 제2제정(1852~1870)의 문화 정책에 힘입어 활발히 활동을 재개하면서, 프랑스 연극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해 이른바 '불바르 연극'을 탄생시켰다. 당시 파리 보드빌 극장(1792)과 바리에테 극장 (1803)에서 활동하던 희극작가들은 이후 짐나즈 극장 (1820)과 재건된 팔레루아얄 극장(1831)으로 영역을 넓히며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 극장들은 오늘날 오페라극장 주변의 가로수 대로, 이른바 불바르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발생한 '불바르 연극'은 후에 가벼운 희극을 의미하는 '불바르 희극(comedie de boulevard)'으로 정착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 연극의 유형은 크게 불바르 희극 이외에 알렉상드르 뒤마가 역사..

외국희곡 2023.10.02

박양원 '그물 안의 여인들'

청년 의학박사 서필운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의 암세포에 관한 연구는 특히 국내의학계에서 커다란 기대와 관심 속에 싸였으며, 그것은 또한 젊고 야심만만한 필운에게 의사 로서의 야망을 불태울 수 있는 충분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출세와 명예가 곧 손에 잡힌 듯 다가온 그에게 좌절은 너무나 빠르게 시작됐다. 바로 그의 아내 미숙이 간암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귀국해서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불행은 필운에게 구체적으로 압박감을 주었고, 그 시련은 곧 자신의 온갖 영달과 야심에 가득 찬 야망에, 메울 수 없는 함정을 파 놓고 말았다. 필운이 이 구체적이고 분명한 시련과 씨름하고 있을 무렵, 은경이 나타났다. 은경은 필운의 미국 유학 시 가까이 지낸 여인이다. 밝고 싱싱한 그녀의 체취와..

한국희곡 2023.10.02

장우재 '이 형사님 수사법'

연극 은 강남구 세곡동 비닐하우스 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이를 수사하는 강력1반 형사들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작품이 시작되면서 애초에 범인이 누구인지 밝힌 후 범인을 수사하는 코믹하고 황당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연극에는 개성 강한 형사들의 조작적인 수사 과정,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하고 비논리적인 전개와 유희들로 가득 차있다. 장우재는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연극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범죄를 돌파해보기 위해 독특하고 황당한 방식으로 수사에 접근하는 강력1반의 수사법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객이 상상하는 그 이상을, 아니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로 초대할 이 작품은 배꼽 잡는 웃음 ..

한국희곡 202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