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유진 오닐 '밧줄'

clint 2024. 10. 2. 06:12

 

 

바닷가 높은 곳에 있는 농가,

늙은 노인 벤트리가 광에 매달아 놓은 새끼줄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5년전에 아들 루크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난 후 광기에 사로잡혀

성경구절을 읊고 욕을 해대며 루크가 돌아와 새끼줄에 목매달기를 고대한다.

그의 딸 애니와 남편 스위니는 벤트리가 땅을 저당잡히고 빌린 금화 천불을

찾아내어 농장을 경영하려 한다. 스위니는 어린 딸 메어리에게 벤트리를 집으로

데려 가게한 후 애니와 함께 돈을 찾기 위한 궁리를 한다.

이때 루크가 긴 방랑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다.

스위니는 루크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돈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짐짓 친절한 척 술을 권하며 비위를 맞춘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벤트리는 맨발로 뛰어나와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목을 매라고 한다.

루크는 벤트리가 농담하는 걸로 생각하고 즐겁게 장단을 맞추지만

그것이 벤트리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화를 내는데....

 

 

 

초기 단막극인 밧줄(The Rope, 1918). 이 작품은 보다 완숙미 있는 작품으로, 오닐은 여기서 인간의 꿈과 좌절은 물론 부자 및 형제간의 애증을 보여주고 있다. 후취 소생인 아들과, 그리고 딸과 사위에게 배반당한 홀아비 벤트리가 바다 쪽을 향해 애처롭게 부르는 찬송가는 현대인의 삶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자신의 저물어 가는 인생에 대한 회한일 수도 있고,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다. 벤트리는 의지할 아내도 없는 노인으로, 남은 가족에게서조차 철저히 버림받고 소외되어 있다. 가느다란 다리는 류머티즘에 걸려 뒤틀려 있고, 단장에 의지 한 채 겨우 비틀거린다. 해는 저물고 석양의 그림자가 길어진 바다를 응시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상징의 극치이다. 그가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간에 대한 호소이며 설교인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나 딸은 회개는커녕 아버지를 괴롭히고 그의 돈을 빼앗기 위해 그를 처치할 생각까지 한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아들에 대한 사랑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루크가 집에 돌아오자 그는 늙은 몸을 몸부림치며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읊는다. 말을 잇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흐느끼는 아버지를 보고, 루크는 “아버지는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그 썩어빠진 성경말씀을 떠들어대는군요”라며 비웃는다. 아버지의 깊은 뜻을 탕자이자 이단자인 아들이 알 리가 없다. 아버지가 설치해 놓고 아들이 돌아와 목을 매달기를 원하는 밧줄은 고난과 회개를 상징하며, 그것을 통과하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신의 메시지인 셈이다. 밧줄을 당기기만 하면 그가 원하던 금화가 쏟아질 것이며 그의 꿈이 펼쳐질 터이지만, 탕아인 아들이 그런 진리를 깨달을 리 없다. 또한, 아버지가 꿈꾸는 희망은 방탕한 아들이 돌아와 목을 매는 의식을 통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신이 남겨주는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세계이다. 하지만 아들이 추구하는 꿈의 세계는 인간성이 상실되고 가족 간의 기본적인 유대마저 찾아볼 수 없는 타락한 세계이다. 그가 지금까지 밖에서 찾았던 꿈의 세계가 바로 자신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비극인 셈이다. 결국 밧줄 속에 감춰진 금화는 어린 외손녀인 메리가 우연히 밧줄을 갖고 장난치다가 발견하게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번쩍이는 금화를 바다에 장난치듯 던져버린다. 아버지와 아들의 꿈은 모두 허망하게 좌절되고 만다. 

 

 

 

 “우리 시대가 끝났다"고 믿는 아버지와

집을 떠나 “이 썩어빠진 지구 덩어리를 방랑”하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아들에게 애정을 지닌 아버지와

낭비벽이 심한 아들이 싸우는 내용이지만, 작품의 매력은 중요한 오브제인 죽음의 덫과

같은 올가미가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역설로 바뀌는 데 있다.
이처럼 유진 오닐의 단막극이 지닌 재미는 극의 말미에서 보여지는 반전에 있다.

인간의 욕망과 찌그러진 삶을 살아가는 암울함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