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천명 가량의 손님이 찾아오는 <티볼리>라는 대형 식당의 주방을
배경으로 한다. 30명의 요리사, 웨이트리스, 키친 포터들이
점심 서빙을 준비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다혈질의 젊은 독일인 요리사 피터와
유부녀인 영국인 웨이트리스 모니크 사이의 불행한 사랑이 있다.
1막에서는 광란과 같은 점심 서빙 시간으로 점차 고조되어 간다.
막간에는 키친 포터들과 요리사들이 점심 서빙을 마친 후 휴식시간으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이야기하는 서정적인 장면이다.
2막은 모든 요리사들이 저녁 서빙을 준비하며 점점 분주해지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피터는 모니크와의 갈등이 심해지고 맘대로 자기영역을 침범한
한 웨이트리스가 자기의 요리를 가져가자 화가 나서 오븐으로
이어지는 가스선을 끊어버린다.
피터의 폭력적 행동에 격분한 레스토랑 사장은 그의 직원들에게 최상의
일과 돈과 음식을 제공해주는 데도 왜 그처럼 불만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느냐?!"고 외치는 사장 마랑고의 물음으로 막이 내린다.
1959년 로얄 코트 극장에서 초연된 <키친>은 1961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고 같은 해에 미국에서 영화화 된 웨스커 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단막극으로 쓰여졌으나 1961년 재공연될 때 작가가 지금의 우리가 보거나 읽은 2부작으로 개작하였다. <키친>은 전 세계의 역량 있는 연출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으며 1994년 로얄 코트 극장에서의 공연을 통해서 시대를 초월해서 사랑 받는 작품임을 입증하였다.
웨스커는 작품의 서문을 통해서 자신의 <키친>이 세상을 상징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는 세계가 무대였을지 모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키친이 그러하다.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머물지 못한다. 우정, 사랑, 적대감도 빨리 생기는 것처럼 빨리 잊혀진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웨스커가 부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세상은 생존에 허덕여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힘든 후기 산업사회의 고용현장이다. 이 작품은 하루 2천명 가량의 손님이 찾아오는 <티볼리>라는 대형 대중식당의 주방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 속 인물의 대사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주방은 국제연합이다. 요리사만 십여 명인데 그들은 영국인 외에도 독일, 아일랜드, 키프로스, 이탈리아 등 출신국이 다양하다. 요리사들은 각기 자신의 조리대에서 맡은 일을 해내느라 땀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시간 내에 주문을 소화해내는 것이 임무이다. 극은 주방의 아침 모습을 담은 1막, 점심 손님이 지나간 휴식시간을 담은 막간, 그리고 저녁 손님을 맞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키친은 아침, 점심, 저녁 무렵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하루 일이 시작되기 전 키친의 모습은 평화스럽고, 구성원들 간에 농담이 있으며 배려가 있다. 하지만 일이 밀려들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타인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다. 견제를 넘어서서 바야흐로 전쟁이다. 손님이 빠져나간 오후 휴식시간에는 독일인 피터와 유태인 폴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시작되면 그뿐,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적인 동작만 남을 뿐이다.
지나친 스트레스가 사람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는 극의 중심인물인 독일인 피터와 아일랜드인 신참자 케빈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인물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피터는 명랑하고 성격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티볼리 식당에서의 3년이 그를 완전히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의 가장 큰 특징은 "햐햐햐" 라고 하는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웃음이다. 그는 그 웃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조롱한다. 작가는 그의 미친 듯한 웃음이 결국 키친 전체의 분위기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케빈이 처음 등장했을 때 피터는 그가 식당 일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관심을 표명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급해지고, 케빈이 레몬을 썰기 위해 도마를 빌리려 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한다. 케빈은 피터가 좀 더 인간적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지만, 피터는 '시간이 없어'를 연발할 뿐이다. 작가는 돈벌이를 위해 보수가 좋은 이곳에 처음 온 케빈을 통해서 지금 상황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본다. "음식에 자부심을 갖고 수익도 내는 작은 식당 하나 경영하는 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케빈의 그런 꿈은 '돈, 돈, 돈'을 외치는 피터의 말에 의하여 묵살된다. 세상은 돈을 쫓고, 사람들도 다 돈을 쫓는 현실 속에서, 맛좋은 음식을 기분 좋게 제공하는 작은 식당경영은 헛된 꿈일 뿐이다. 피터와 케빈 이외에도 이 극의 인물들은 나름대로 비인간적인 식당 근무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식당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주방장은 보고도 못본 척하는 기교를 익혔다. 즉 되도록 안 보고 안 듣고 관여하지 않는 것이 그의 생존 전략이다. 따라서 그는 몇몇 가까운 요리사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다. 65살 된 알프레도 영감도 식당에서 생존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주인을 싫어하지만 자기가 고용인이라는 처지를 잘 받아드리고 있으며, 해야할 일을 제시간에 해내는 것, 그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부주방장인 프랭크, 요리사 맥스와 니콜라스는 술에 절어서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이 비인간적인 고용 현장은 단지 티볼리 식당의 주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인물들 - 피터와 폴과 디미트리 - 의 입을 통해서 단지 '공장'이란 틀을 썼을 뿐이지 세상은 키친으로 가득 차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세상에는 비인간적인 인간들- 돼지들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기계를 조립하는 것을 좋아하는 키프로스 출신 디미트리는 자기의 재주를 살려서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한다. 부엌이나 공장이나 버스 회사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빵부 요리사 폴은 이웃인 버스 운전사와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생존 경쟁은 인간에게서 동료애를 앗아가며 남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크나큰 벽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런 세상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키친이 사라져 버리면 피터가 말한 대로 그들은 실직자 될 것이며 굶어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폴은 이 일을 그만 두어버리는 것이 근본적 문제해결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피터는 부엌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서 대항하지만, 폴의 말처럼 그만두는 것만 이 문제의 해결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파국은 유부녀 모니끄와의 관계에 빠져있는 피터에 의해서 비롯된다. 애인 모니끄가 남편과 헤어질 것을 거부하자, 피터는 발작적으로 도끼를 휘둘러 가스관을 끊어버리고 부엌의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하지만 피터의 파괴행위가 인간조건, 노동조건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피터의 폭발은 떠돌이 거지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주방장은 떠돌이에게 멀건 수프를 건네지만 피터는 그에게 고기덩이 2개를 주어보낸다. 주방장은 피터에게 "네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짓을 하느냐" 고 다그치고, 마랑고 사장은 그를 "자신의 재산을 거덜낸 놈"으로 취급한다. 곧 피터는 모니끄와 마주한다. 피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모니끄는 남편과의 결별을 거부하고 피터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결정적 파국은 피터를 기다리다 못해, 서빙할 음식을 직접 접시에 담아가는 웨이트레스가 제공한다. 피터는 그녀에게 작업대는 자기만의 왕국이며 자기만의 생존터임을 상기시킨다. 자신이 혐오하는 일을 통해서만 자존을 찾을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피터는 지지 않고 응수하는 웨이트레스를 제치고 주방 전체를 향해 도끼를 휘두른다. 피터의 폭력과 그 동기는 작품이 던지는 '일과 인간'에 관한 메시지와는 직접 관련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디미트리의 말대로 하루종일 주방에 쳐박혀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이성적인 논지를 기대하겠는가?
휴식 시간 중 동료들에게 각자의 꿈을 말해보라고 권했던 피터는 스스로의 꿈은 말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는 부엌에서는 꿈을 꿀 수 없다고 했다. 꿈을 앗아가는 부엌이 그의 발작에 일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식당 주인인 마랑고 씨 또한 깨달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가동시킨 기계가 그의 삶의 전부이며 누군가가 그것을 멈추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부엌은 기계이고 요리사들은 기계의 부품일 뿐이다. 피터는 결국 마랑고의 우려를 현실화하였다. 하지만 식당주인인 마랑고 영감은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더 해주어야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결국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없는 노동환경을 고발한다. 인간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돈은 생존 충분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케빈의 말대로, 티볼리의 주방은 '사람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익 추구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체제를 비판하고, 근로자의 권익보장을 촉구하는 이 작품은 웨스커에게 사회주의 작가라는 이름을 얹어주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이념을 떠나서 이 작품에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추구, 억압에 대한 반항이라는 인본주의적인 메시지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폴이 말했던 근로자로서 조직체에 대한 책임 문제와 피터가 대표하는 개인 우선의 태도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 작품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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