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장 아누이 '짐 없는 여행자'

clint 2024. 10. 1. 07:15

 

 

 

 

가스통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 후 기억상실증에 걸려

전쟁 후 자선병원에서 18년간 치료를 받았다.

그를 여러 다양한 가족들이 아들이라 주장했고 그중에 자선병원의 공작부인은

르노 가족이 진정한 가스통의 가족이라 여겨 먼저 그 집을 방문한다.

가스통은 르노 가에서 어머니인 르노부인과 형인 조르슈, 형수인 발랑틴느 등을 만나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나 그의 입대 전의 행적은 동물을 학대하고 죽이고,

하녀와의 스캔들, 친구와의 싸움으로 인한 사고사, 모친과의 불화, 또한 형수와의

불륜관계 등 모든 게 전형적인 부르주아 악동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런 과거 행적에 자신이 싫어진 그는 의식적으로 르노 가족과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나 결정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그의 등 뒤의 작은 흉터를 말하는

발랑틴느의 얘기를 듣고 그 흉터를 확인한다. 그리고 모두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은 르노 가족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 흉터를 역으로 이용해서

마당살레 가족이라며 훌훌 털고 르노 가를 떠난다.

 

 

 

 

1937년 G. 피토에프에 의해서 상연된 <짐이 없는 여행자>는 전쟁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나이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됨에 따라 그 추악함에 절망을 느끼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으로 초기 장 아누이의 결정적인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을 두고 프랑스의 작가 장 지로두는 ‘짐 없는 여행객’이라 불렀다.
이 어구를 제목으로 삼은 또 다른 프랑스 작가 장 아누이의 희곡은 이제 짐작할 수 있듯이

망각의 강을 헤엄쳐야 하는 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 인물 가스통이 꽤 흥미로운 캐릭터인 것은 그로서는 잃어버린 과거를

차라리 복원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한다. 이래저래

되찾아진 기억은 그가 예전에 악행만을 일삼던 ‘괴물’이었음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18년 2월 1일 프랑스의 리옹-브로토 역. 독일 발 전쟁포로 송환 호송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플랫폼을 배회하고 있었다. 발견 당시 그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고 신원을 나타내는 군번도, 소속 연대를 나타내는 견장도 없었다. 다만 심문 과정에서 무심코 나온 "망젱"이란 이름을 따 앙텔므 망젱으로 불렸을 뿐이다. 1922년 2월, 프랑스 당국은 망젱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신문에 그의 사진을 실었다. 또 퇴역 군인들은 전국의 시청 건물에 그에 관한 게시문을 붙였다. 모두 3백여 명의 사람들이 망젱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으나 대부분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확인했다. 다만 20여 명의 가족들만이 망젱을 자신의 가족이라고 주장하며 서로 맞섰다. 유가족들 간의 법정 소송은 이후 망젱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25만여 명 이상의 군인들이 행방불명됐다. 그들의 가족들은 행방불명 통지서 외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망젱은 유가족들에게 희망이 됐다. 그에 관한 신문기사는 동시대인들 사이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극작가 장 아누이의  <짐 없는 여행자>(1936)가 거기서 모티브를 찾아 발표하고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장 아누이 (Jean Anouilh : 1910. 6. 23 프랑스 보르도~ 1987. 10. 3)
프랑스의 가장 개성적인 극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아주 강한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배우들, 아내들, 연인들, 비평가와 예술적 전통주의자들, 관료들에 대한 그의 반감만큼이나 강한 연극에의 애정이 깊이 담겨 있다. 또한 극중극·플래시백·플래시포워드·배역교환 등의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아누이의 가족은 그가 10대 때 파리로 이사했다. 그는 파리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광고회사에서 잠시 일했으나, 18세 때 장 지로두의 〈시그프리드 Siegfried〉를 보고 연극적·시적 언어에 감동받아 연극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배우이자 연출가인 루이 주베의 비서로도 잠시 일했다. 첫 공연 작품은 〈수달모피 L'Hermine〉(1932 공연)였으며, 1937년 〈짐 없는 여행자 Le Voyageur sans bagage〉로 성공을 거둔 데 이어서, 1938년 〈흔들리는 마음 La Sauvage〉을 발표했다. 아누이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무대 위로 시(詩)와 상상력을 복귀시키는 극장주의(theatricalism)를 지지했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양식화하여 이용하기도 하고, 역사를 다시 쓰기도 하고, 코메디 발레나 현대의 성격희극을 발표하는 등 기법면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실존주의자 장 폴 사르트르처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인간현실 속의 모순, 예를 들면 선과 악의 모호한 관계 등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인생관을 발전시켜나갔다. 그 자신이 제목을 붙인 2권의 대표 희곡집 〈장밋빛 극 Pièces roses〉·〈어두운 극 Pièces noires〉에는 비슷한 주제를 약간 가볍게 다룬 작품들이 실려 있다. 아누이의 연극에 나타나는 세계관은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의 작품은 특권이 부여된 동심의 세계를 잃어버리게 된 어른들을 보여준다. 등장인물 가운데 일부는 이 사실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도적들의 무도회 Le Bal des voleurs〉(1938)에 나오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한편 〈안티고네 Antigone〉(1944)의 안티고네 같은 인물들은 조금도 이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성(城)에의 초대 L'Invitation au château〉(1947)에서 그의 작품 분위기는 더 어두워졌으며, 〈투우사의 왈츠 La Valse des toréadors〉(1952)에서는 노부부가 죽음의 춤을 추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종달새 L'Alouette〉(1953)는 안티고네나 〈흔들리는 마음〉의 테레즈 타르드처럼 세계와 그 질서 및 흔해빠진 행복을 거부하는, 아누이가 창조한 또 하나의 반항아 잔 다르크의 정신적인 모험을 다루고 있다. 또다른 역사극 〈베케트 : 신의 영광 Becket ou l'honneur de Dieu〉(1959)에서는 고결한 영혼과 정치권력의 틈에서 파괴당하는 우정을 그리고 있다. 1950년대에 아누이는 자신의 세계관에 정치적 소요를 새로 끌어들여 〈불쌍한 비토 Pauvre Bitos, ou le Dîner de têtes〉(1956)를 발표했다. 1960년대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부조리극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나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에 비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빵장수 가족 Le Boulanger, la boulangère et le petit mitron〉(1968)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으나, 그뒤 10년간 쓴 〈사랑하는 앙투안 Cher Antoine:ou, l'amour raté〉·(1969)·〈금붕어 Les Poissons rouges:ou, Mon père, ce héros〉(1970)·〈부인을 깨우지 마세요 Ne réveillez pas madame〉(1970)·〈오페라 연출가 Le Directeur de l'opéra〉(1972)·〈체포 L'Arrestation〉(1975)·〈공연대본 Le Scénario〉(1976)·〈헨리 4세 만세 Vive Henry Ⅳ〉(1977)·〈반바지 La Culotte〉(1978) 등은 그가 대가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작품들이었다. 아누이는 영화대본도 몇 편 써서 성공했으며, 영미 극작가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