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홍콩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학교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일련의 새 교칙을
제정하지만 이는 곧 학교구성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다.
학교에는 교장과 교감이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돌며
학교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진다.
이때 한 학생이 교통사고가 나고, 교사, 학생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는 교감은
이로 인해 전근을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교사, 학생들은 학교 측의 처사에 항의를 하고,
학교는 점점 더 어지러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급기야 학생들은 수업거부를 하기 시작하고
교사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각종 매체는 이를 보도하러 오면서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된다.
귀융캉이 2013년 홍콩연예학원 재학시절 한 수업에서 구상한 희곡 <원칙>은 2016년 홍콩 레퍼토리 극단의 '신극 발전플랜'에서 완성되었고, 2017년 홍콩 레퍼토리 극단의 블랙박스 씨어터에서 초연이 올라갔다. 2022 아시아 아카데미창의 대상 '홍콩지역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제10회 홍콩소극 장상 '최우수희곡상', 제28회 홍콩무대극상 '최우수희곡상' 및 2019년 상하이 이 연극대상 '올해의 최우수작가상'에 노 미네이트되었다.
<원칙>은 '교육의 장'인 학교를 배경으로 처벌과 관용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그려 내는 동시에 각 인물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육과정의 원칙에 대한 사유의 공간을 열어낸다. 원칙주의자 링즈는 지나치게 완고해 보이지만 유년시절 담임선생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기억과 한 기관의 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자애로운 교육자인 천셴은 원칙을 중시하지 않는 그저 '사람 좋은 사람' 같지만, 미래 세대가 스스로 설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이념을 실천하며 스스로 사직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중문 담당교사이자 학생신문 지도교사인 차이린 은 급변하는 교육정책 속에서도 일선교사로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해왔지만, 교감의 전근 이슈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학생회장 푸페이징은 학생회장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교장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잘 따르던 교감선생님이 곤경에 처하게 되자, 학생운동을 조직하게 된다. 전 보는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지만, 학생신문 편집부로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자 애쓰는 인물이다. 흡사 '정의란 무엇인가의 연극 버전 같은 본 작품은 각 인물들의 감추어진 소신과 각자의 합리성을 차례로 드러낸다. 작품을 읽으며 독자는 자연스레 갈등의 해결을 기대하지만, 작품은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통쾌한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다. 답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답답함과 처벌과 관용, 법치와 휴머니즘, 교육의 본질 등 다양한 가치, 그리고 이에 따른 선택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본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한 사건은 중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펑위사건'이다. 펑위 사건은 2006년 난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중국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20대 남성인 펑위는 버스를 타려고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넘어진 할머니를 발견한다. 그는 할머니를 부축하고, 병원에 가서 가족에게 연락을 하는 등의 필요한 응급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오히려 그를 가해자로 지목하여 고소를 하였고, 이에 펑위는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판사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쌍방 과실로 판결을 했고, 치료비 등을 양쪽이 나누어 부담하게 하였다. 이 판결은 중국인들의 공분을 샀고, 이후 중국사회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봐도 돕는 것을 꺼리는 방관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은 훗날 펑위가 자신이 할머니를 밀친 가해자가 맞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동안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의 가족은 사회적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이사를 다녀야 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이미 억울한 피해자의 모습이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법원의 무능함이 도마에 올랐을 뿐, 선행을 하면 화를 입는다는 냉소적 분위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펑위 사건은 억울한 약자의 편을 들고자 했던 사람들의 본능적 선의가 법리의 눈을 가리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궈융캉은 법리와 인정이라는 두 가지 미덕이 충돌할 때 생긴 딜레마에 착안하여 본인의 중학교 재학 시절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면서 제정한 일련의 교칙이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경험 담 속에 이를 녹아내었다. 궈융캉은 이를 통해 처벌과 관용 사이 균형점을 사유하고, 교육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전한다. 체육복을 갈아입는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각 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선택을 하며 갈등을 쌓아가는 서사는 깔끔하면서도 힘 있게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 작품을 번역한 2024년, 한국 사회 및 성격 심리학회에서 올해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확증편향'을 선정하였다. 사회의 여러 사안들이 꽉 물린 교합 상태처럼 극단적 대립 국면 에 놓여 있다. 대화의 가능성과 효용성에 대한 회의가 가득찬 우리 사회 또한 격렬한 분노만 남은 대립 국면에서 한 걸음 물러 나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열리길 바라본다. 아울러 홍콩의 교육 현장 속에 담긴 홍콩의 동시대적 모습도 본 작품의 매력이다. 홍콩반환 이후, 급변하는 홍콩 정세가 국제 뉴스를 통해 전해지지만, 홍콩인들의 삶에 대해서 이해할 창이 많지 않았다. 홍콩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체감하고 있는 홍콩의 동시대적 모습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홍콩 사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점 또한 이 작품의 매력으로 손꼽고 싶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호프 작 김민정 윤색 '갈매기' (2) | 2024.07.01 |
---|---|
브라이언 프리웰, '자유 도시' (1) | 2024.06.29 |
마르틴 발저 '실내전' (1) | 2024.06.27 |
마갈리 무젤 '쉬지 스톨크' (1) | 2024.06.24 |
도스토옙스키/ 괴테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1) | 202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