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은용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clint 2023. 7. 27. 15:27

 

지금 한국에 사는 에프티엠트랜스젠더 당사자인 작가 이은용의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었을 때, 이 캐릭터들이 말하고 있는 생활 체험은 끊임없는 미스핏(misfit)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몇 년 전까지는 -아직도 그런가요?- 정신과에 먼저 가서 한 이십만 원 하는 검사를 받아 진정한 트랜스젠더임을 인증 받으면 성전환증 진단서류가 나왔습니다”라는 진희의 말 혹은 “이 서류가 말하길 당신은 여성이라고 하는데요, 실례지만, 당신은 여성처럼 보이지 않는데, 이게 본인이 맞나요?” 라는 공항 직원의 말.
에프티엠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생활 체험이 드러난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연극은, 트랜스젠더를 ‘연기’할 수 없다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며 출발gks다. 그래서 동물 소리를 내거나, 끊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대사를 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다큐멘터리적 재현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거절하는 것 같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계속 함께다. 극장의 벽을 뚫고 극장의 바깥까지 뻗어나갈 것 같은 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소수자의 생활 체험이 담긴 말들과 만났을 때 갖는 힘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이 연극의 농담들에, 슬픔과 분노의 역사에 대한 증언이 겹쳐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너무나 많이 받다 보니, 에프티엠트랜스젠더 진희는 첫음절만 듣고도 질문을 예상할 수 있다. “(호) 아, 호르몬의 작용. 일단 목소리가 낮아져요.”라는 식으로. 이런 진희가 ‘암 언 아티스트 앤 트렌스젠더’가 국경을 통과해 월경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라고 말할 때, 자신을 또 다시 문 앞에 세우고야 마는 공항직원에게 ‘암 언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 라고 말할 때, 이 되받아치는 듯한 농담 아래에도 증언이 작동하고 있다. 편견과 배제가 만들어온 슬픔과 분노,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본 사람의 역사가 그 농담 같은 뉘앙스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들을 듣고 관객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웃을 수 없었던 역사를 농담으로 가시화하겠다는 결심까지도 전해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속 문을 두드리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감각이며, 자신의 장례식장에 무지개 깃발을 걸어 달라고 유언하는 사람의 감각이다.

 

 

작가의 글 이은용

고대 그리스에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소년 시절 그는 숲길을 지나다 교미하는 뱀들을 보고 무심코 지팡이로 때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소녀로 변해 그 몸으로 몇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지나다 다시 그 뱀들이 교미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시 뱀들을 때렸고 다시 남자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테이레시아스는 남자로 돌아가길 택했다는 점이다. 2020년 현재, 트랜스젠더가 존재하느냐 아니냐 정의하기 앞서 이 지점을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는 이 육신으로 정신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했다. 누군가는 선택지가 있을 때 그것을 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경계의 교묘한 사이로 이어진다. 이분법적 사회가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갈라놓는다면, 그 경계에는 문이 있다. 우리는 그 문을 계속 두드린다이 희곡은 그 문과 두드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문 하나. 공항에서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지키는 이들은 넘는 이들을 검사하며 묻는다. 이 여권의 사람은 당신인가요? 기재된 성별과 당신의 심신은 일치하나요? 여성과 남성 중 누가 당신의 신체검사를 담당하기를 바라나요? 둘 중 누군가가 나의 몸을 만진다. 빠르게. 둘 중 누군가가 나의 몸을 묻는다. 시간과 공간이 충분하다면 지킴이들은 더 많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이 경계를 넘게 되었나요? 왜 그러기로 결정하셨나요? 당신의 육신은 그 경계의 어디 즈음에 있나요? 천국이 존재하여 그 앞에도 문이 있고 그 열쇠를 잡은 사람이 있다면, 그도 같은 질문을 던질까? 경계를 월경하는 공간에서는 언제나 그런 질문들이 남을지도 모른다. 천국의 경계 앞에 선 문지기 또한 인간의 언어로 세상을 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