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국민성 '할미꽃 전설'

clint 2023. 7. 25. 20:34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한쪽에 간단한 신당이 꾸며져 있고 무당 신자가 서있다. 첫 장면에서부터 <할미꽃 전설>은 무속의 분위기를 깔고 있다. 민간신앙인 무속은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준다. 무속은 죽은 자의 혼령이 저승에 무사히 이르도록 하고, 산 자는 죄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점에서 살풀이의 의미가 크다. 아마도 굿판이 벌어지는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은 인물이 치유되는 것을 보면서 함께 치유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무대는 간단한 장치, 소품, 조명, 그리고 라이브 음악으로 꾸며져 있지만, 관객은 무대를 거짓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곳이 신당이라면 신당으로 믿고, 천안, 신촌, 강남, 수원이라고 하면 그렇다고 인정한다. 인물 중 할매와 애기씨는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혼령이지만, 혼령의 존재에 대해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이렇듯 세상에 대해 통째로 의심을 버리고 전적인 신뢰를 보낸 적이 있는가. 붉은 천을 꺼내며 피가 난다고 하면 그렇다고 믿고, 갑자기 조명이 밝아지며 더운 여름이라고 하면 관객도 더워진다. 인물들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감정이 출렁인다. 세 아들을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키워냈건만 구박받는 할매를 보면 왠지 자기 일 같아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름도 없이 세상 공기도 마셔보지 못한 채 죽어야 했던 애기씨의 사연을 들으면 울컥해진다. 신자 역시 무용수를 꿈꾸었지만 애기씨가 몸주가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무당의 길로 들어서야 했던 상처가 있다. 그리고 오늘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 애기씨는 신자를 놔주고 저승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신자는 그때까지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애기씨는 다름 아닌 자신의 태중 아기였던 것이다. 극의 대단원에 이르면 죄책감에 시달리던 신자는 애기씨와 마지막 굿판을 벌인다. 신당에 촛불이 켜지고 아련한 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혼령이 원한을 풀고 저승으로 편안하게 천도하라는 씻김굿이 펼쳐진다. 신자는 흰 천을 감아 만든 매듭을 풀어내는 고풀이를 하고, 흰 천의 가운데를 찢어 길을 내는 길 닦음을 행한다. 씻김굿은 말 그대로 이승의 모든 허물과 죄를 씻어내는 행위다. 무대를 가득 채운 커다란 흰 천이 쫙 갈라질 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

 

 

작가의 글 국민성

이 작품은 '할미꽃 전설'을 모티브로 하였다. '할미꽃 전설'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부분 자식 혹은 손자·손녀를 정성으로 키운 어미나 할미가 늙어 거동조차 불편할 때 그들로부터 내침 당해 산속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었고, 이듬해 그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을 할미꽃이라 불렀다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 노인 자살율 1위란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식들로부터 학대, 외면당하는 노인이 늘어난 이후 두드러진 이런 현상으로 인해 '할미꽃 전설'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연애, 결혼, 출산, 집 마련, 인간관계, , 희망을 포기한 20·30세대를 일컬어 7포 세대라고 한단다. 7포 세대의 영향 탓일까, 대한민국의 낙태율도 1위란다. 늙은 부모는 자식한테 내침 당하고, 태중 자식은 준비되지 않은 무책임한 부모로부터 살해당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이제 와서 이미 구석기시대 유물로 전락해버린 삼강오륜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더 늦기 전에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사라진 세상과 인류에는 희망도 없다." 자식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자와, 낙태를 통해 자식을 버린 여자의 숙명적 만남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생명 경시 태도를 반성하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과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되새김질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