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두려움을 응시하는 창작실험극, 혹은 일상의 두려움에 관한 잠언이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상상적 감정이 사람들의 관계 속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게 될까?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풍경과 그 안에 겹쳐진 여러 겹의 내면들이 그려내는 궤적을 쫓아가보면 거대한 도시 한 켠에 도착하게 된다.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만나서 벌어지는 일들과 만남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선을 주목해보자. 사람들이 각자의 두려움을 안고 만났을 때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감정들과 상대로부터 연상된 어떤 것들이 서로에게 파동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현실의 관계망 어디 즈음엔가 어설프게 존재하고 있는 인물들은 일상과 그 틈새에 숨어 있는 개인적 환상들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거대한 도시 한 켠으로부터 두려움은 그들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낯선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사람들은 내면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다. 그들의 몽상과 기억, 상상과 중얼거림이 뒤섞여 낯설고도 친숙한 역에 내리게 되는데... 그 곳에서 사람들은 ‘나’이자 동시에 '타인'의 모습으로 존재하며 거대한 꿈속에 빠져든다.
1. 비디오 가게: 단숨에 멋진 삶속으로 진입하게 될 거라고 믿고 싶은 비디오가게 청년 오디션에 떨어져도 언젠가는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에 당당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은 그를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2. 방문 :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나를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르는 게 생기면 언제나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아직은 이런 나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절대,
3. 옷 가게 :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타인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믿고 있는 전부를 이야기한 것 뿐인데, 상대의 상처는 다시 부메랑처럼 나에게 날아온다.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늘 이렇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나? 그럼 나는 뭐지?
4. 동사무소 : 어떤 일도 변화도 일상의 리듬 속으로 흡입해버리는 블랙홀. 하지만 아무 불만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5. 오락실 : 작가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 글 한 줄 써보려는 힘겨운 노력도 나를 에워싼 일상들에 발목 잡힌다. 오늘도 그녀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오락실에 앉아 있다. 이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6. 거울 앞 : 별 것도 아닌 일에 노여워하고 나면 나이 먹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건가...
7. 모델하우스 : 잊고 싶은 기억은 예고 없이 찾아와 나를 날뛰게 만든다. 지워버렸는데도 찢어버렸는데도 기억은 그림자처럼 나에게 붙어 있다. 휴지통에 버려진 나의 기억이 타인에 의해 복원되다니.
그리고 각자의 두려움은 뭉개진 꿈속에서 서로와 함께 하다.
자기 삶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타인의 삶에서 엑스트라가 된다. 영화배우를 꿈꾸는 비디오 가게 점원, 부끄럽지 않을 나를 준비하고 또 준비하며 혼자 사는 여자, 자신 있게 완벽한 코디를 제안하고 싶은 옷가게 점원, 일상의 리듬에 따분해 하는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 시장바구니를 든 채 오늘도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작가 지망생, 늘어가는 주름살과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여인, 새 집으로 이사가 옛 사랑을 잊고 싶은 여자.
한 동네에서 서로 마주치는 이 7인의 인물은 각자 삶을 상징하는 7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자,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6개 에피소드의 엑스트라다. 에피소드는 총 7개지만 각 에피소드는 다시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에피소드와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내면의 에피소드에서 비디오 가게 점원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홀로 집에 있는 여자는 고통을 무릅쓰고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한다. 옷가게 점원은 자신이 제안하는 코디를 의심하고, 동사무소 직원은 일상의 리듬을 즐긴다. 작가지망생은 오락실을 맴도는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고, 거울 앞의 여인은 주름제거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옛 사랑을 잊고 싶은 여자는 자신을 비웃는 듯한 사람들에게 외친다. “뭘 봐! 난, 새로 시작할 거야.”
내면의 에피소드는 아무 일 없는 듯이 돌아가는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꿈, 분노, 광기, 그리고 누구나 외치고 싶은 내면의 소리, ‘나’도 한 번 터뜨려 보고 싶은 외침을 들려준다. 20∼30대의 연출가 홍은지, 안무가 이은주, 그리고 연기자들이 공동구성의 방식으로 만든 작품답게 연기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곱 개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이들은 다시 내면의 한 층 아래로 더 내려가 무의식을 퍼포먼스로 형상화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몸짓, 억압되고 뒤틀린 자아, 항상 점잖게 감춰야만 하는 욕망의 굴곡.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삶은 다를지라도 이 시대 도시 젊은이들의 내면에서는 동질적인 ‘두려움’과 ‘불안’이 발견된다. ‘지금’ 현실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걸며 무대와 객석에서 이 시대를 함께 느끼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의 내면에 이렇게 불안과 두려움이 점철돼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또 한편으로 정말 슬픈 일이다. 무대의 주인공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 불안과 두려움의 무게는 7개 에피소드의 전개가 보여준 이 시대의 ‘속도감’을 무너뜨리고 조금은 불안정한 에필로그로 맺어졌다. 언젠가 이들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내면에서 ‘희망’과 ‘환희’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잔혹한 세상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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