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의 16번째 작품 『아담도 이브도 없는』은 그녀가 16년 전쯤(매년 한 권씩이니 작가로 데뷔하기 직전) 16년 만에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살았다)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말하자면 일본여자가 되기 위해 다시 일본 땅을 밟으면서 시작된다.
일본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그녀가 슈퍼마켓 게시판에 쪽지를 남긴다. ‘프랑스어 과외, 흥미로운 가격.’ 전화를 걸어온 건 스무 살 청년 린리, 콘크리트 성에 살며 하얀 벤츠를 몰고 다니는 갑부의 아들, 말하자면 현대판 백마 탄 기사님이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공주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중세 기사처럼 행동하고, 난데없이 템플 기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까지 한다. (아멜리의 손에 들러붙은 스위스 퐁뒤를 이빨로 갉아내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영판 무릎 꿇고 귀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중세기사의 모습이다). 그는 더없이 진지하게 프랑스식 사랑을 흉내 낸다. 그렇다면 아멜리는? 그녀가 린리에게 느끼는 건 ‘아이(愛)’가 아니라 ‘코이(戀)’다. ‘코이’는 전혀 심각하지 않은, 가볍고, 우아하고, 재미있고, 섬세한 감정이다. ‘코이’ 의 가장 큰 매력은 순전히 장난하는 ‘아이’를 패러디하는 데 있다 (작품 곳곳이 패러디인데- 심지어 프랑스어판 책표지는 영화 〈킬빌〉의 패러디다- 그중에서도 ‘최후의 만찬’, ‘아담과 이브’ 패러디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그 일본인 청년이 정형화된 일본 연애방식에 따라 벚나무 아래에서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때,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다.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문화를 향유하며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린리가 청혼만 하지 않았다면. 그 사이 일본기업 유미모토 사에 입사해 갖은 굴욕을 당하던 아멜리에게 린리의 청혼은 어떻게 보면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없다. 지옥 같은 직장을 때려치우고, 꿈꾸던 일본 국적을 얻고, 평생 갑부의 아내로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그러나 아멜리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새로운 이브는 새로운 아담이 따다준 과일을 나눠먹지 않는다. 그녀는 ‘위험을 걱정하지 않고 1,900미터 고지를 날아오르는 새’, ‘후지 산과 춤을 추는 자라투스트라’니까. 자유는 그녀가 막연히 꿈꾸던 것의 전제조건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달아난다. 연(戀)과 연(緣)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비상함으로써 작가가 된다.
그런데 잘못 놀린 혓바닥에 살아있는 낙지가 여전히 붙어 있다. 몇 년 후, 일본에서 열린 『살인자의 건강법』 출판 기념회에서 다시 만난 린리가 (젓가락으로 찌르듯)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준 다음에야 낙지의 빨판이 떨어진다. ‘사랑이야기를 소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니까. 젊은 한 시절, 세상을 부유하며 맛과 멋을 함께 나눈 사무라이들의 ‘우애어린 포옹’에 얼어있던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녹는다. 그리고 눈물이 흐른다. 『아담도 이브도 없는』은 곳곳에 배치된 패러디와 문화적, 언어적 차이에 착안한 유머가 돋보이고, 아멜리가 쓴 중에선 드물게도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이가 없는’ 깔끔한 소설이다. 올해 보졸레 누보 맛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2007년산 아멜리 노통브는 맛이 빼어나다. 마음껏 시음해 봐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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