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직조공'

clint 2015. 11. 9. 13:01

 

 

 

 

 

독일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희곡작품. 당시 법정과 의회에서도 논란이 될 정도로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1862-1946)은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슐레지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예나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 다원과 헤켈의 진화론, 그리고 당대를 풍미하던 사회개혁론을 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창작활동 기는 1889년부터 1차 대전 사이인데. "특히 드라마 영역에서 풍부하고 다재다능했던 그의 탁월한 업적”에 대해 1912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됨으로써. 현대드라마에서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하우프트만은 자신이 잘 아는 주변사람들 - 고향 슐레지엔 산골과 베를린 근교 주민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의 드라마의 목표는 현실을 최대한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시종일관 지역 방언을 적극 사용하였다. 또한 무대배경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배우에게 고도로 정밀한 행동을 요구하고, 부자연스런 연기나 감탄사, 독백 등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로서는 금기되어 있던 예민한 사회적 주제를 과감하게 무대에 올려놓았던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하우프트만은 독일문학사에서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자로서 확고한 자리를 점유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들은 매번 새로운 연출기법으로 각색되어 빈번히 무대에 올려 지고 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제 1 막의 배경은 페트스발다우. 직조공들이 제품을 가지고 와서 품삯을 받으려 줄 서있다. 그들 대부분이 온순하고 겁 많은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직물 검사원이 갖가지 트집을 잡아 공임을 삭감하자, 직조공들 사이에 불평과 슬픔이 자리잡는다. 여기에서 사건의 배경과 장차 다가올 폭동의 원인이 시사되고 있다. 제 2 막의 장면은 카슈바하. 한 직조공 가정의 비참한 삶이 그려진다. (저 서양의 한 마을에서도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때마침 군에서 제대하여 돌아온 청년 예거가 마을의 참상을 목격하고 분개한다. 그가 공장주를 비난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님으로써 폭동의 조짐이 인다. 제 3 막은 페트스발다우의 한 주막. 예거를 비롯한 일단의 직조공들이 공장주의 착취와 직조공들의 참상을 외치고 다니면서 소란을 일으킨다. 이들의 대화 속에, 공장주들 같은 새로이 부상하는 기업주는 물론이요, 독일에서 19세기까지 잔존하였던 봉건귀족, 그리고 소 농민들까지도 모두 직조공들을 착취하는 계층으로 그려진다. 19세기 중엽 독일지역의 사회구조를 짐작케 한다. 먹고살기도 힘든 직조공들이 조상의 장례식만은 빚이라도 얻어 성대하게 치르고 그 뒷감당을 못해 허덕이는 불합리한 관습, 목사들이 이를 만류하기는커녕 장례식 헌금에 눈독을 들여 오히려 부추기는 현실 등등이 외부인과의 대화 속에 기술된다. 제 4 막은 페트스발다우. 공장주의 집. 직조공들이 공장주의 저택을 습격하고 파괴한다. 경찰은 몰매를 맞고 내쫓기며 공장주의 가족들은 피신한다. 마지막 제 5 장은 랑엔비일라우. 직조공들의 집 안팎 광경. 경건한 직조공 노인 힐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면서 폭동에 가담하기를 거부한다. 베틀에 남아 천직을 계속하기를 고집하던 그는 출동한 진압군의 유탄에 맞아 절명한다. 노인과 직조공 반란 대와의 대화에서 사태의 종말이 암시된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면에서 작품의 분위기는 일전한다. 1막에서 4막 까지를 관통하는 사회혁명 적, 경향극적 속성은 기독교적, 인도주의적. 反혁명극적 성향으로 변화한다. 작가의 지향점이 사회주의 혁명 같은 것에 있지 않고 특수한 환경 속에서의 개인의 운명에 있음이 여기에서 확인된다.
형식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 적 전통극의 구성 원칙을 좇아 5막 극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거리의 진행은 전통극의 특징인 완결성, 일관성,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특정한 주인공이 없이 각각 다른 장면에서 여러 인물들이 병렬적으로 묘사되고. 그럼으로써 인물들의 비참한 실정이 종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드라마 장르로 때. 전형적인 “환경 묘사 극 Milieu drama"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초연은 1893년 2월 베를린 자유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그러나 계급투쟁 적 작품으로 오해받아 프로이센 행정당국에 의해 1년 이상 공연이 금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베를린에서 상연되고 그후 3년간 무려 300회의 공연기록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오늘날까지 「직조공」은 전 독일의 연극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려지고 있다.

 

 

 

하우프트만이 목표로 한 것은 종래처럼 드라마의 줄거리의 전개가 아니라 거의 기록 작성자처럼 환경을 충실히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환경 묘사에는 강렬하고, 때로는 무거운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 이 환경 묘사에는 일종의 인간심리가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중에 인간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않으며, 인간을 그 본능과 환경에다 못 박아, 이것에 의하여 인간에게서 모든 결정의 자유를 박탈해 버린다. 하우프트만의 작중 인물들은 암흑의 힘에 의하여 시달려 그 희생이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힘을 상실해 버리고 스스로 그 실존 때문에 파멸되어 간다. 하우프트만은 자기 자신의 고뇌를 체험삼아 말기의 시민 사회의 분석 해부가가 된 것이다. 입센의 스타일에 가까운 것으로서 〈평화제 Das Friedenfest〉 (1890)와 〈외로운 사람들 Einsame Menschen〉(1891)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이것은 시민 문화의 붕괴를 진단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절박한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라고 〈외로운 사람들〉에 나오는 온순하고, 신경질 적이며, 기분파인 포케라트(Vockerat)가 말한다. 그는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는 인간이며, 건강과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에 대하여 동경하고 있으면서도 이 동경을 실현시킬 만한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양친이나 아내와 같은 주위의 환경이 그보다 더 힘이 세다. 자기를 이해해 주는 오직 한 사람의 여학생 안나(Anna)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결국 투신자살하고 만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것은 가정의 파국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희생된 정신적인 인간의 비극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바친다."라고 하우프트만은 헌사(獻辭)에 썼다. 그는 자기 주위의 시민 사회의 갈등을 묘사했지만, 그 곳에는 이것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새로운 인간의 타입이 엿보인다. 하우프트만의 문학에는 기독교적인 성실성에서 우러나오는 사회적 동정의 윤리가 살아 있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의 자연주의적 문체에 오랫동안 잊혀 왔던 깊이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적 체험의 바탕에서 나오는 세계고(世界苦)가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사회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직조공들 Die Weber〉(1892)이라는 극에서 그는 기계에 의하여 빵을 빼앗기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슐레지엔의 노동자들이라는 하나의 집단 비극을 묘사했다. 하이네는 이미 그들을 위하여 직조공의 노래를 작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하우프트만의 작품에서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고독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계급과 고난을 같이함으로써 하나로 뭉쳐진 민중 층인 것이다.

 

 

 

사실상 이와 같은 것은 연극사상 결정적인 첫 발걸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참고 참다가, 끝내 절망한 나머지 절규하고, 드디어 착취자에 대항하여 궐기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실의 잔학성에 직면하여 절망한 인간의 페시미즘이 이 드라마에 깊숙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하우프트만은 정치 · 사회적 선동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려 고뇌하고 있는 가련한 인간들의 비극을 쓴 것이다. 그는 혁명적인 모리츠 예거(Moritz Jäger)와 적색분자 베커(Bäcker)에 대하여 기독교적이며 의무에 충실한 늙은 직조공 힐제(Hilse)의 모습을 빌어 믿음이 깊은 인종(忍從)의 에토스를 대치시켰다. 그가 이 작품을 창작한 것은 인간의 고뇌에 깊은 동정을 가졌기 때문이며, 인간의 고경(苦境)에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독일인으로는 네 번째, 희곡 작가로서는 첫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5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상을 받았는데, 이 정도 나이에 수상작가로 선정된 것을 보면 당시 작품의 문학적 깊이가 상당했음이 증명된다. 하우프트만은 예나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취리히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그는 사실 조각가가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향지역 예술 교육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대리석의 나라이자 조각예술 교육이 활발하게 발전했던 이태리로 유학을 가 몇 년 더 공부하기도 했다. 이태리에서 창조에 대한 부담을 느끼던 그는 조각에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하여 각 분야의 공부도 병행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조각가가 되지는 못했다. 조국의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당시 베를린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술적 혁명을 꿈꾸던 전위작가, 철학가들과 교제하며 문학적 분위기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그는 슐레지엔의 휴양도시에서 알찬 수입으로 명성이 자자한 호텔을 경영하던 아버지 덕택에 생활의 어려움 없이 예술세계에 빠질만한 여유가 있었다. 이즈음 그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문학에 집중한다. 1885년의 베를린에서 그는 자신이 그때까지 심도 있게 공부한 철학적·신학적 지식과 조각가로서의 예술성이 어우러지는 문학성 짙은 작품을 쓰기에는 희곡이 알맞다고 여겼다.
그리고 1889년에 하우프트만은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발휘하여 쓴 첫 번째 희곡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을 발표했다. 이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때, 관객들의 충격은 상당했다. 19세기의 수사학적이고 규율에 얽매이던 그동안의 연극과 달리 새로웠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이 사실적 자유주의 경향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유명 작가로 급부상한 것은 물론, 독일의 현대문학에 자유주의 기운을 불어넣은 최초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20세기 초 독일의 가장 탁월한 극작가였던 하우프트만이 쓴 극은 자연주의에서 상징주의를 거쳐 사실주의 성향을 띄게 된다.

 

 

 

이 후부터 하웁트만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전 세계 독자와 관람객에게 칭송 받게 된 [직조공들(Die Weber)] 외 [한넬레의 승천(Hanneles Himmelfahrt)], [침종(Die versunkene Glocke)]등의 걸작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작품이자 정부 당국에도 매우 비판적이었던 사회극인 [직조공들(1892)]은 1844년 일어난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폭동을 극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연발생적인 노동쟁의를 그린 만큼 특정한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40여명의 등장인물의 개별적 특성 묘사에 치중하고 있으며, 노동쟁의를 무대로 올린 최초의 연극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후에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동정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연속 발표하면서 사회적 현실과 일상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재생산했다. 하웁트만의 초기 작품들은 지금도 전 세계 어디에선가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침종]을 비롯한 몇몇 작품이 국립극장과 대학 연극부 등지에서 50여 년 전부터 무대에 올려졌다. 이렇듯 그의 초기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 노년의 후기 작품들은 평작들로 비평되었다. 그의 노년은 세계 제 2차 대전이 일어날 즈음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에 남아 있었는데, 중립과 평화라는 신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며 고국에 머물러 많은 비난을 받곤 했다. 이 사이 펴낸 작품들 또한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초기 희곡들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10년 주기로 노벨상수상 작가들을 평가할 때, 1910년에서 20년까지의 시기는 ‘문학적 중립의 시대’ 였다고 평론가들은 이야기한다. 이즈음 여러 나라에서 중립 정책이 표방되었으며, 민족 간의 편견을 불식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에 맞는 정책에 앞장섰던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작가들이 많이 수상하였는데, 독일 출신의 하우프트만도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작품을 썼기에 수상이 가능했다. 그는 편견에 맞서는 약한 자를 위한 작품을 구상했다. 그래서 그의 가장 대표작이랄 수 있는 [직조공들]의 경우 정치적 이유로 공연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평화주의자적 신념으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기에 가장 좋은 작품을 썼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여겨졌기에 수상작가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