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임철우 '붉은 방'

clint 2017. 2. 17. 09:55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했다가 보충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아홉 시가 되는, 숨가쁘게 반복되는 일상 생활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빠듯한 시간에 허둥거리는 자신의 꼬락서니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전세금 걱정에 울상 짓는 아내를 뒤로 한 채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뜻밖의 변을 당한다. 낯선 두 남자에게 납치된 것이다. 납치되어 가면서 오기섭은 자신에게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 그대로인 창 밖 세계의 풍경을 본면서 이렇게 쉽게 자신과 세계가 단절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아득한 절망감과 함께 자신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대해 절실한 애정을 느끼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온 오기섭은 유치장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군대 동기인 서정민의 부탁으로 수배중이던 이상준이라는 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 준 일 때문이었다. 오기섭은 ‘붉은 방’으로 끌려가 최달식이란 자에게 신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야만과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절감한다. 최달식은 빨갱이에 대한 깊은 한을 품은 자였다. 그는 6 25 사변 때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부모를 제외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어린 나이에 겪었다. 또 증오에 찬 아버지가 인민군을 죽이는 장면도 똑똑히 목격했다. 그는 그때의 핏빛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후, 경찰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폐인이 되어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노망이 들어 지금껏 그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다. 그는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을 것이고 자신의 가족도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뇌막염으로 죽은 아들 한수 역시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지독한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피의 지옥, 붉은 방에서 피의 응어리를 간직한 최달식에 의해 오기섭은 철저히 파괴된다. 굴욕감과 끝없는 고문에 의해 오기섭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했지만, 그와 동시에 강렬한 생의 욕구를 느낀다. 결국 각본 대로 자술서를 쓴 오기섭은 깊이 모를 절망감과 엄청난 분노를 간직하게 된다. 그래서 이미 자기 자신은 존재할 수 없음을 느낀다.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최달식은 붉은 방에만 들어오면 쾌감 같기도 하고 통증 같기도 한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 방의 아늑함을 좋아했다. 붉은 방에서 악인을 멸해 달라고 기도하는 최달식은 신의 은총이 방안에 가득함을 느낀다.

 
 

 

 

     
극장식당에서 화려한 쇼의 막이 열릴 때에 우리가 상상 못하는 어느 밀실에서는 한 남자가 처절한 고문을 받고 있다.

80년대의 감수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붉은 방'은 체제와 이데오로기의 폭력,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동요되는 인간의 모습과 그로 인해 심리적으로 손상받고 육체적으로 마모되는 과정을 끈질기게 파헤친 소설로서 특히 분단 문제에서 파생된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와 과거, 개인과 사회, 실존적 고뇌와 공동체적 실천, 그리고 상이의 문제에 대해서 작가 임철우는 당대의 폭력과 과거의 폭력, 개인의 마멸과 사회의 부도덕함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임철우의 소설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붉은 방'에서도 금속성의 폭력 앞에 두려워만 할 뿐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런 인물들을 통해 그의 소설은 서정성이 드러나고 독백의 언어를 통해 서정시의 세계를 담는다. '붉은 방'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세계와 자아의 단절을 드러내고 붉은 색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나아가 주인공들의 내면에 담긴 피해 의식의 역사적 의미를 끈질기게 파헤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아픔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오기섭은 출근하기에 바쁘다. 아침식사도 거르고 시간에 쫓겨 출근하는 오기섭은, 결혼한 지 3년 된 아내와 갓난아이를 두었고, 일상적인 여느 아침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집 앞에서 두 사나이에게 영문도 모른 채 붙들려 간다.
한편, 수사관인 최달식 과장은 사건 마무리 때문에 며칠 째 집에도 못 들어간 상태에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아내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는 목사님 심방에 잠깐 집에 들를 것을 말하면서 노망이든 어머니가 똥을 싸서 집안을 더럽혀 놓았다고 짜증을 부린다. 붉은방에 들어온 기섭은 친구의 부탁으로 수배자를 잠시 묵도록 해준 사실 때문에 끌려와 무차별 구타 등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달식은 그 이상의 여죄를 가혹하게 추궁한다.
이틀째, 샌님 같은 기섭이 출근도 하지 않고 간밤에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현실에 기섭의 아내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고, 달식의 아내는 목사님 심방예배에 들를 것을 재차 독촉한다. 달식은 부하 수사관들과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한 잡담을 늘어놓는다. 이때에 상급자가 들어와서 사건 마무리를 독촉한다. 이어 기섭을 본격적으로 취조하던 달식은, 기섭의 백부가 6.25때 인민 위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사상적으로 의심을 품고, 급기야 혹독한 물고문을 가하여 간첩죄 로 옭아맨다. 이때에 달식의 집에서는 목사의 심방예배가 열리고 있고, 기섭의 아내는 남편의 행방을 찾아 헤맨다.
기섭을 반체제운동을 하던 지하조직의 자금 및 도피은신처 제공, 북과의 연락책임자 등의 혐의로 사건을 마무리 한 수사관들은, 그날 저녁 룸살롱에 가서 술과 여자로써 피로를 푼다. 달식은 술이 취한 채 기섭이 잠들어 있는 붉은방에 나타난다.
달식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빨갱이들은 이 세상에서 씨를 말려야 하고, 본인은 그러한 임무를 맡았다고 기섭에게 횡설수설 한다. 기섭은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담담히 말한다.
다음날, 사건 마무리 회의를 하던 상급자들은 오기섭은 별로 혐의점이 없으니 풀어주라고 달식에게 지시한다. 기섭을 내보낸 달식은 항상 마음이 편안한 붉은방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고, 원점으로 돌아온 기섭은 반쯤 정신이 몽롱해져 거리를 헤맨다. 이때에 극장식당에서는 화려한 쇼의 막이 내린다.

 

 

 

임철우(林哲右: 1954- )

전남 완도 출생. 전남대 영문과, 서강대 대학원 영문과 졸업. 1981년<서울신문>신춘문예에<개 도둑>이 당선되어 등단함. 그는 현실의 왜곡된 삶의 실상을 통해서 인간의 절대적 존재 의식을 탐구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아버지의 땅>,<그리운 남쪽>,<달빛 밟기>,<붉은 방>,<볼록 거울>,<불임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