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현화 '누구세요'

clint 2016. 10. 19. 13:39

 

 

 

1970년대 중반, 작가 이현화는 우리시대 병적인 정치상황이 야기시킨 모든 관계의 실종이라는 문제를 「누구세요?」를 통해 ‘부부’라고 하는 원초적 관계의 실종으로부터 접근해간다.
이현화의<누구세요?>는 현대 의식에서 그리고 드라마의 기교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상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작품인<쉬잇 쉬잇 쉬잇>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전개가 중요한 뜻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상황의 나열이다. 현대적인 상황을 나열하여, 그 속에 갇힌 더할 수 없이 작아 보이고 음험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이 이현화가 보여주는 인간의 자기 상실이다. 이와 같은 의식과 기교는 칠십 년의 신극 역사에서 볼 때에 우리 극작가들이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등장은 우리 연극계에 참신한 바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바람은 연극을 으레 이야기의 발전으로 생각하는 묵은 관객들에게는 재미없는 연극의 제공밖에 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 나라의 연극이 지닌 낡았지만 그런대로 친밀한 사건의 전개가 없이 현대극이라는 이름 아래 내밀어지는 부담스런 괴기성이나 의미 없는 되풀이나 종결 없는 줄거리는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런 현대극일수록 논리의 전개(구성)가 정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마주치는 ‘낯선 자기(일상성)’라는 주제는 철저한 계산 아래 서로 마주치는 충격으로 다가와야 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나누어진 기하학적인 선이 또 다른 남녀 A, B에서 구축되지 못한 것은 작가의 모자라는 구성력 때문이다. 이런 결점은 오늘의 부부의 모습을 구현하는 데에 쏟은 젊은 연출가 유재천의 정열만으로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미숙한 연기와 통속적인 연줄로 빛깔이 바래진 A, B의 에로티즘은 그것이 지닌 사회 비평적인 측면은 무시된다 치더라도 주인공 ‘남(한인수)’과 ‘여(오미연)’의 소외된 부부상과의 대비기능으로서의 구실은 하고 있다.
무릇 모든 예술은 현실에 가려진 실재의 연줄을 이어서 감추어진 진실과 사물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눈에 드러난 사건의 시작과 끝을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착각하는 통속 작가들에게, 우리는 가면에 가려진 우리의 일상생활과 그 가면이 벗겨진 어느 날의 우리들의 일상성이 노출시키는 어두운 공포 같은 충격을 연극예술을 통해 얻고자 한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여섯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극에서 제1경은 부부라고 추측되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애인과의 여행에서 돌아와 관심도 애정도 없는 자신들의 남편과 부인에 대해 긴 전화독백을 하는 장면으로 전화가 끝난 후 두 남녀는 대면을 하게 되지만 서로에게 “누구세요?”라는 질문만을 던진다.
제2경에서 두 남녀는 서로 아파트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결국 이웃 여자를 불러 확인하고자 하나 허사일 뿐이다. 그리고 이때 돌연 다른 남자 A가 아파트에 들어온다.
제4경에서 상황은 뒤바뀌어, 침입한 남자 A가 이집의 주인임을 주장하며 두 남녀를 묶어놓는다. 이때 여자 A가 돌연 등장하여 남편인 듯한 남자 A를 데리고 나간다.1)
제5경에서 남자와 여자는 부부관계인 듯 추측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이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본능적 가학 - 피가학의 난무를 벌이고 나서 제6경에서 남자와 여자는 아내와 남편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된 부부관계도 일순간 여자가 시장 간 사이에 남자는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곧이어 여자 A가 이 아파트의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남자와 여자 A는 사랑을 나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 세계 속에 확실하고 안정된 관계는 하나도 없다. 1970년대 중반 우리사회의 억압되고 혼돈의 상황에서 야기될 수 있는 모든 인간관계의 실종을 작가 이현화는 ‘부부’라고 하는 가장 원초적 관계의 부재라는 소재를 통해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타락한 세계는 타락한 방식으로 반영되듯이 성적 무질서라는 외면상의 형식을 통해 현대사회의 관계실종이라는 문제를 표출했던 것이다.

 

 

 

 

 


1986년 10월 30일字 조선일보 문화면에서는 당시 공연되고 있던 「누구세요?」를 ‘부부관계를 다룬 극으로 중년여성 관객을 모으고 있는 창작극’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최근 1990년 9월부터 10월에 있는 공연 평에서 평론가 김방옥은 ‘현대부부의 소외, 음탕한 장난기’라는 부제를 달아 작품을 다루었다. 즉 1970년대 중반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작품 「누구세요?」가 가지는 확대된 의미 내지는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정치겭英맛?배경의 염두를 강조하지만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달라진 정치겭英맛?상황은 오히려 작품이 지니는 일차적 의미내지는 그 성적 외도에 더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이다.

 

 

 

 

 

어느 비오고 폭풍 몰아치는 여름밤-무대는 아파트의 방-어떤 여인이 들어오고 이윽고 어떤 남자가 들어와 서로 자기가 이 집의 주인임을 내세워 나가 달라고 실갱이를 한다. 여자와 남자는 각기 저마다 은밀한 정사 끝에 걸려오는 전화로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남녀와 대화를 한다. 그러나 무대 위의 두 남녀는 부부 같아 보이고 논리도 부부여야 하는데 이 남녀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낯선 남남이다. 사건이라고 하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줄 이웃 여인과 그녀의 숨겨진 은밀한 남자 파파의 등장. 이 남녀 A는 그들의 실수를 깨닫는다. 오해는 풀리고 그들이 돌아간 뒤 화해주에 얼근해진 남자가 깨진 꽃병에 다쳐 피를 흘리며, 세속의 권화인 일개 은행원에 불과한 그가 피에 굶주린 야성의 짐승처럼 일상의 아내를 겁탈한다.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다음날 출장에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는 남편은 목욕을 하고, 아내는 장보러 간다. 욕탕에서 나온 남자는 이웃집 여인의 환대를 받으며 지난 바닷가의 정사를 회상하는 포옹을 하고 시장에서 돌아온 아내는 문 밖에서 계속 차임벨을 누르고….
이런 줄거리는 음산한 바깥, 비바람 불고 천둥 번개 치는 외경과 내적 풍경을 하나 되게 한다. 우리의 내면 풍경도 비바람 불고 천둥 번개 친다. 맨날 똑같은 생활의 반복, 꼭두각시 같은 삶의 되풀이에 지친 정신은 폭풍을 내포한 음산한 육체의 반란을 꿈꾼다. 생활인의 전형인 은행원, 깐깐한 하루살이의 프로그램은 한 치의 틈도 허용되지 않는다. 비정한 금전출납부에 기재되는 숫자의 나열과 피의 쇠잔, 그것은 삶의 활력을 좀먹는 현대의 한 모델이다.
현대의 삶은 그렇게 꿈마저 퇴색시킨다. 현대의 삶은 도시 아파트의 획일화, 쫓기는 일상의 여유를 앗아간다. 만족이라는 것도 얼마나 소시민적인가. 일정한 시간의 출∙퇴근, 일정한 시간의 식사,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양의 차∙담배∙술, 일정한 양의 탈선과 비밀과 정사의 그런 것들도 프로그램화되다시피 짜여 있다. 잠자는 시간, 정사의 횟수까지 조절되면 붉은 피도 피가 아니고 정열도 야성도 한낱 짐승의 고함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는 꼭두각시의 집합체, 조직 속의 인간은 진실로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반복된 삶과 권태, 꼭두인형 가운데서 때때로 반란을 꿈꾸는 인간들이 생겨난다. 그들이 예술가들이며 사상가들이며 선각자들이며 예지자들이다. 그들이 이 삭막한 세상을 내면 풍경으로 그리며, 예술로 형상화하고 미래를 진단하고 예언한다.
예술로 그려지는 현대 문명은 인간소외의 갖가지 그림이다. 그것은 반복되기 때문에 자동 인형으로 그려지고 지겨운 권태로 그려진다. 혹은 비정한 폭력으로, 기계의 톱니바퀴로, 눌변으로, 요설로 그려지기도 한다. 대화는 서로 단절되어 있다. 같은 하나의 단어도 동의어가 아니고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의 절망은 그런 식으로 그려진다. 부조리 연극이 특히 말이 되지 않는 논리 전개의 비약을 받아들인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 살면 부부도 남남이 되고 타인도 어느날 내연의 아내처럼 정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뒤죽박죽의 사건은 합리적인 사건진행을 뒤집어 놓고 일상적인 기승전결을 무시해 버린다.

 

 


<누구세요?>는 그런 부조리한 현대의 소외된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우선 부부의 신의도 없어졌다. 그러면서 쾌락은 은밀히 사기성의 일상 속에 추구된다. 정열의 메말라 버린 인간들, 특히 남성들은 생활에 의해 중성화된다. 피를 보고 나서 남자는 피를 묻히며-극중에서는 그런 섬뜩한 장면이 연관되지 않았다-자기 아내이자 남의 아내 같은 여자를 정복한다. 누구세요? 하고 질문을 받으면 그 대상자는 본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고대의 주술심리에서 연유하는 것이다.<누구세요?>라는 작품은 본체를 숨기고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우리에게 던져진 본질회귀의 물음이다. 낯선 타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인 탓으로 남과 남의 거리를 확인하는 물음이기도 한<누구세요?>는 부부와 같은, 이른바 촌수가 없는 가장 가까운 인간의 관계에 거리를 두게 하고 거기에서 생기는 이질감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 물음은 서로의 본체를 타진하는, 그래서 본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 된다.
질문은 주술이다. 주술적인 말은 마물(摩物)의 모습을 드러내게 한다. 이름 불려져서 귀신도 바탕을 드러내고 본체가 탄로난 초월적인 존재는 가부간에 그의 선악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이현화의<누구세요?>에서 낯선 남남으로 맞부딪친 부부는 서로 남자와 여자로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어야 한다. 잠재의식의 깊은 바닥에 숨겨 놓았던 남자와 여자의 마성, 그것은 이현화의 경우에는 섹스일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피의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녀, 혹은 인간들의 극복될 수 없는 남남의식 일는지 모른다. 그것은 너무나 깊은 바닥에 감추어졌던 우리들 자신의 비밀이기 때문에 거기 조명된 언어의 주술이 우리를 으스스하게 만든다. 그 음산한 내면 풍경이 비바람 치는 폭풍우의 외경(外景)이 된다. 실상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런 무서운 안팎의 풍경은 되풀이되어 벌어진다. 그것을 일상이라는 얄팍한 외피로 싸 감추며 그것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인간의 존재는 그런 심연을 외면한다. 그러나 그 심연을 둘러싼 반복되는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누구세요? 누구시죠?” “당신은 누구요?” “정체를 밝히세요!” “말의 주박(呪縛)에 걸려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본체를 드러내어라!” 그리하여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틈이 조명되고 현대의 획일화된 아파트 단지의 삶의 균열이 입을 벌리고 그리하여 세계 속에 낯선 우리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음을<누구세요?>가 증언한다. 그래서 반복은 행위에서도 나타나고 특히 언어적인 되풀이는 남녀의 똑같은 어투로 반복되고 꼭두각시 인형 같은 삶의 권태로움을 반증하면서 관계의 소멸을 확증시킨다. 남자는 남자 A가 되어도 상관없고, 여자는 여자 A가 되어도 상관없다. 이미 그들은 모두 남이니까 남남의 관계는 부부처럼 보이는 남자와 여자, 내연의 관계인 남자 A와 여자 A의 관계가 되거나 남자와 남자 A, 남자와 여자 A의 관계가 되어도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와 여자 A의 관계의 설정은 여자와 남자A의 관계로 대비되지 않으면 불합리해진다.
그러나 어차피<누구세요?>는 합리성을 강구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속에 있는 불합리성의 어둠이 현대적인 삶의 테두리 속에서 기형적으로 불거져 나온 드라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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