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진주 '열녀를 위한 장례식'

clint 2024. 5. 17. 16:16

 

 

 

과부가 수절하는 것만으로는 열녀문이 세워질 수 없고, 
왕조의 혈통을 의심하는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어, 
금서와 관련된 ‘책쾌’ 즉 도서유통업자들과 양반들이 
참수당하는 엄혹한 시절. 
젊은 과부 월영이 죽어 고을에 열녀문이 세워졌고 
잔치가 벌어지지만 자기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운선은 
월영의 일기장을 찾아 그 죽음의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그때, 비밀리에 함께 독서 계모임을 진행하던 운선과 부인들은 
자신들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책쾌’ 조생이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온 것을 발견하고 숨겨주려 한다. 
한편 운선은 월영의 시누이인 강주를 계모임에 다시 불러 
일기장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는데...

 


공연이 시작되면, 자신을 '조선의 걸어다니는 책대여점'인 책쾌 '조생'이라 주장하는 자가 무대에 등장한다. 이 인물은 『박씨전』을 찾는 관객들에게 재고가 없으니 대신 책에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며, 자신이 열녀문이 세워진 한 고을에 도착하게 되었던 과거의 시점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책쾌의 옷을 입고 조생을 상징하는 붉은 수염을 달고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조생의 여식 '난이'로, '최대감 집을 찾아가라'는 조생의 유언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 한 고을에 도착한다. 그때, 이 고을에서는 '수절하고 남편을 따라죽었다.'는 과부 '월영'을 기리는 열녀문이 세워져 잔칫날과 다름없는 풍경이다. 사람들은 고을에 열녀가 난 덕분에 세금과 부역이 감면되고 여러 혜택을 받게 되었다며 한 과부의 목숨 값으로 흥겹게 잔치를 치른다. 설상가상으로 임금 정조는 왕정을 위협하는 책이나 패관소설. 잡서를 금서로 지정하며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행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난이의 차림새를 보고 책쾌 의심해 신고하려 하자, 조생이 다시 나타났다고 오해한 시녀 '미루'가 난이를 최대감집 규방으로 피신시키면서 이 연극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규방에 모인 여섯 명의 여인들은 각자의 처지도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조생과 함께 계모임을 빙자하여 비밀리에 책을 읽고 글을 짓던 사람들이다. 조생이 돌연 사라지는 바람에 모임이 중단되었는데, 책쾌의 피가 흐르는 난이의 등장으로 이 여인들은 모임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이렇 듯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여성의 정조와 희생이 사람의 목숨보다 우위에 놓이고 읽고 쓰는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대를 배경으로, 시대를 의심하고 그 정신에 저항하며 책을 읽고 "이야기를 써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사연을 차례로 펼쳐 놓는다.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규방에 모인 인물들이 처한 사건과 사연을 병렬식으로 배치하고, 이 인물들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를 액자식인 극중극으로 구성한다. 극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운선'과 '난이'다. 열녀 월영의 언니 운선은 동생의 죽음을 타살로 의심하여 추적해 나가는 한편, 난이는 최대감집에서 친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중심인물 외에도 기생에 빠진 남편을 둔 '덕선'과 본처의 자식들을 거둔 후처 '미룡', 첫사랑과 바람이 난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소하', 그리고 소하의 용맹하고 지혜로운 시녀 '미루'의 이야기가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와 나란히 놓인다. 이들은 규방에서 난이와 함께 소설 『구운몽』을 읽게 되지만 "책을 읽는 게 성에 차지 않아서 "이야기를 뒤 집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이야기인 '박씨전'을 짓게 된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자신에게 당면한 질문과 자 신이 꿈꾸는 세상을 이야기에 반영해 나간다.



작가의 말 - 진주
이 연극은 ‘박씨전은 누가 썼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누가 그 영웅적 모습을 꿈꾸 었을까’, 혹시 ‘규방에 모인 여성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상상으로 연결됐습니다. 희곡을 쓰는 동안 영웅을 꿈꾸며 소설을 쓰는 사람들, 가부장제 아래에서 성별과 계급, 장애의 유무와 성 적 지향성 등을 이유로 배제되고 억압된 인물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함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의 탄생'을 저 역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 연극은 누구나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어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자 할 때,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부장제에 갇혀 각자의 한계 안에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또 이데올로기와 관습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폭력, 사회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고, 그 죽음조차 지워지는 약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무엇일까요? 담장 밖에서 그리고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슬픔 과 아픔들에 대해 우리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야기가 그것을 도울 수 있을까요? 이 연극이 아주 멀지만 가까운 이야기로 들려지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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