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는 상민과 인화 두 남녀를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성적인 욕망과 종속적인 미시권력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이라 해도 인간이 지닌 막연하면서도 근원적인 소외와 고독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저히 타인관의 관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종속관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바로 극중극 형식으로 나타나는 변상민의 소설 ‘개를 낳은 여인’이다. 작품 속에는 극중극처럼 공상 소설의 세계가 나타난다. 지구의 현실과는 다른 미래의 공상 세계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개와 인간의 합성체인 도그험(dog-human의 줄임말 doghum)과 인간이 대립하고 투쟁한다. 인간은 동물과 인간의 합성체를 대표하는 도그험의 족속을 흉측스런 괴물 또는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도그험과 그들이 사는 세계인 도그험피아를 파괴하려고 한다. 도그험 말살을 주장하는 원장, 그의 희생양으로 등장하나 구원 받는 미스 티, 도그험의 존재를 인정하며 인간과 투쟁을 역설하고 실천하는 수간호사가 등장하여 대립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들의 대립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 이기주의, 생명 경시와 파괴 등의 여러 사회적인 이슈들을 제기하면서 우리 인간 사회의 현재를 비판적으로 풍자한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후기구조주의 사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작금의 문학과 예술은 거대담론으로서의 정치권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미시권력으로서의 정치권력을 문제 삼는다. 거대담론으로서의 정치권력은 낡은 틀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은 가까운 곳에서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의 권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미시 권력을 뜻한다. 거시권력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 우리 피부에 닿지 않지만 미시권력은 늘 피부에 닿아 존재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속에서 나타난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이라 해도 인간이 지닌 막연하면서도 근원적인 소외와 고독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저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옥탑 방에 사는 상민은 가난한 2류 소설가이자 대리운전사다. 상민은 옆집 빌라에 사는 패션디자이너 인화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다. 인화는 이혼한 독신녀로서 오직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사회와 일정하게 동떨어져 생활한다. 상민은 이런 인화를 구원해주고 싶다. 상민은 끝없이 인화 주위를 맴돌다 인화의 사랑하는 개 써니가 인화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고 결론을 짓고 써니를 죽인다. 자신의 개가 처참히 죽은 것을 보고 타살이라 확실한 인화는 개 살인범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고 결국 상민의 존재를 알게 된다. 복수를 위해 상민의 집에 몰래 침입한 인화는 그의 더럽고 낡은 자취방에서 그가 쓴 소설 ‘개를 낳은 여인’을 읽게 되고 묘한 흥미를 느끼게 되며, 그녀의 집에 상민을 초대한다.
작가의 글
2008년 한 해 동안 미국의 뉴저지와 뉴욕 생활은 한국에서 살아왔던 내 삶 전체를 돌이켜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숨 가쁘게 나를 얽어맸던 한국생활의 끈을 풀어놓고 참으로 오랜만에 휴식의 나날을 보냈다. 사람에게 휴식 이란 흐르는 물을 고이게 하는 깊은 웅덩이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때였다, 나는 나를 생각하며 침잠했다 숱한 번민과 상념 가운데 극작가로서의 생애에 관한 자문은 크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 시인을 꿈꿨던 나는 무척 시를 좋아하여 평소에 시 읽기와 습작을 즐겼다. 그러던 내가 개안하듯 새로운 진풍경과 마주대할 수 있었던 전환점은 여석기 선생님의 현대영미희곡 강의였다. 선생님의 강의는 내가 시에서 연극으로 장르의 방향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명한 현대 영미의 명작 희곡들이 펼쳐 보이는 신세계는 신선한 충격과 환희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분의 명 강의는 아직도 생생하여 잊을 수 없다 작품에 대한 명료한 분석과 해박한 지식은 연극에 무지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연극과 처음 접했던 때가 벌써 25년 전이다. 적잖은 세월이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 사이에 심연처럼 가로놓여 있다 연극에 대한 당시의 순수한 열정 은 철없는 젊은 시절에나 갖는 것이라며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문학청년에게 말을 건넨다. 성숙과 관조를 앞세우며 세상과의 타협을 권유한다. 그런데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보라! 내 자신도 감동하지 못하는 창조물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 이 한심 하고 낯 뜨거운 예술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초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보지 못하고 나 자신을 가두었던 [창]을 활짝 열려고 한다. 연극을 통해 세상과의 진실 된 소통을 꿈꿀 것이다 적당한 대중주의, 무장해제의 안이한 현실주의와 정면 대결할 것이다. 이것만이 나와 극단 [창]에게 남은 정신이고 무기다.
창단 공연작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는 그 출발점에 서있다. 어떤 본질 적인 측면에서 이전의 나와, 내 작품 세계와 결별하는 지점에 있다 나는 작품을 구상한 이래 2년 동안 숙성시키면서 이 작품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려 했다. 그중 중요한 하나는 '일상의 변화'다. 고독하고 소외된 현대인이 과연 자기로부터 벗어나 얼마나 일상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변화를 갈망하는 주체가 정작 자신의 변화를 생각해본 적 없거나 두려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대인의 내면을 그리기 위 해 두 중심인물의 독백과 내래이션을 살렸다. 또한 극중 현실과 인간 세계의 문제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극중극의 세계, 즉 공상세계를 설정하여 개와 인간의 합성체 도그험(doghum)이라는 하이브리드 생명체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이 상호 대비되는 두 세계의 형식적, 주제적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게 연출의 초점을 맞췄다 개인과 집단, 소외와 투쟁, 안주와 변화, 정적과 역동이 그것이다.
극단 창의 창단공연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는 창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 하려는 남자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여자의 대립과 변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 작품이다. "연극을 통해 세상과의 진실한 소통을 꿈꾸는 (window), 우리 현실의 폐부를 깊이 찌르기 위한 비판의 '창(spear)” 이 되겠다는 극단의 목표의식과도 잘 부합한다.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는 제목만큼이나 형식이나 소재,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도발적인 시도를 담고 있다. 내레이션과 독백이란 고전적인 화법을 차용하면서도 시각적 이미지와 몸의 물질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포스트^던 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인간과 개의 합성체 '도그험’이란 새로운 존재를 등장 시켜 허구와 현실(욕망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1인칭 전지적 시점을 통해 인물에 대한 몰입을 높이면서도 인물 간 시점의 교차와 대립을 통해 이화효과를 조성한다. 의도적인 충돌이 이 공연의 미학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과 예술의 힘에 대하여 극작가 홍창수는 우리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오봉산 불 지르다>(1999)는 오봉산을 찾아서 불을 지르면 죄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가상의 설화를 배경으로 전통극의 형식을 차용하여 경제적 계급갈등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아으 다롱디리>(2004)는 판소리〈변강쇠가〉를 해체하여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가부장적 편견과 폭력을 풍자하는 마당극이다.〈나비의 꿈〉(2007)은 엄혹한 분단의 시대상황 속에서 간첩혐의로 고국을 찾지 못해 향수병에 시달리면서도 예술혼을 지켜낸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극적인 삶을 통해 예술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이처럼 다양한 소재를 선택하고 폭넓은 양식의 실험을 시도하던 그가 극중극 형식의 신작을 통해 더 치열한 현실인식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연출까지 겸한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는 현실비판에서 나아가 현실적 대안까지 제시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타락한 정치권의 파워게임, 교수와 제자간의 수직적 관계 등 권력문제와 현대인의 소외문제를 전경화 하면서도 실업, 사채, 관음증뿐만 아니라 자본에 휘둘리는 예술의 타락과 같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회와 인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이해에서 출발한다. 극중 변상민의 대사 “인간은 눈곱만큼의 변화로도 엄청난 혁명을 이룰 수 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조리한 현대사회가 변혁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작은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근본을 뒤집는 혁명인 것이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나 하나로도'의 의식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성인화를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함께 하는 세계로 나오게 한 것은 소설, 바로 예술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변화를 위한 예술의 역할에 대한 성찰까지도 담겨있다.
고전적 화법에 현대적 미장센이 어우러져 이 작품은 디자이너 성인화와 작가 변상민의 내면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내레이션과 독백 중심으로 진행된다. 인위적 장치라는 생각 때문에 연극에서 잊혀져가는 내레이션이나 독백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것은 관객에게 인물의 내면을 밀착해서 보여주려는 작가의도 때문이다. 인물간의 내레이션과 독백 의 긴박한 교차는 극적 긴장감과 인물성격의 밀도를 높인다. 유사한 양식을 앞서 시도한 카마 긴카스의 〈검은 수사〉가 대사와 연기를 어긋나게 연출하면서도 서사의 초점을 관객에게 맞췄다면, 이 작품은 인물의 심리를 사실적인 연기양식에 담아내면서도 눈앞의 관객이 아니라 '미지의 독자'에게 설명 하듯이 전개된다. 그렇기에 관객은 보이지 않는 '창'을 통해 무대 위를 엿보는 듯한 낯선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극적 구조는 이중적이다. 변상민과 성인화의 갈등이 벌어지는 현실세계와 변상민의 소설 속 공상세계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된다. 현실세계는 변상민과 성인화의 시점이 대립, 교차하면서 내면변화에 집중하는 정중동의 세계라면, 공상세계는 인간과 도그험이 물리적으로 대립하는 역동적인 세계이다. 두 세계는 극중극 형식을 통해 분리되어 있지만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겹쳐지면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설명적인 화법으로 이루어진 현실세계의 느슨한 템포감은 공상세계의 희화화된 연기, 이미지가 강한 움직임에 의해 보완된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간호사와 같은 혁명가도 필요하지만 성인화와 같은 개인의 자각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는 진정성을 담아 우리에게 작은 변화를 위해 행동하라고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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