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고영범 '이인실'

clint 2023. 9. 9. 17:48

 

변변한 직업이 없는 진석은 교통사고를 계기로 한 몫 챙기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2인실 병실에서 지룡을 만난다. 지룡은 간단한 수술을 위해 입원을 했지만 수술 동의를 해줄 보호자가 없어 퇴원하려고 한다. 이를 본 진석이 보호자 서명란에 대신 사인을 해준다. 그런데 수술 도중 지룡이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어 진석과 미경(진석의 여자친구)은 그를 책임져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의 원무과장은 장기기증에 관련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진석과 미경은 지룡의 연고자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지던 중 지룡이 탈북자라는 사실과,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인실>은 고영범의 신작으로 이 작품의 소재는 다소 생경하게도 탈북자 이야기다. 그러면서 여타 탈북자와 다르다. 탈북자로 환기되는 남과 북의 문제를 형제의 비유로 푸는 것은 일단 익숙하다. 탈북자 지룡과 남한의 광호는 이복형제다. 그런데 극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정작 이들이 아니라 뺀질뺀질한 사기꾼 진석이다. 진석은,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공무원을 협박하며 병원에 드러누워 있는 일명 ‘나이롱 환자’다. 진석은 고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며 비싼 이인실에서 뻔뻔하게 버티고 있고, 이곳에 탈북자 출신의 성실한 공장 노동자 지룡이 찾아온다. 흔히 탈북자의 설정이라면 짐짓 심각한 상황을 연상하기 쉽지만, 지룡의 캐릭터는 심각하기보다는 희극적이다. 우선 지룡은 발음이 비슷한 ‘지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희화화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룡은 이곳에 무슨 거창한 수술을 위해 입원한 것이 아니라 지독한 땀냄새를 제거하기 위한 땀샘수술, 겨드랑이를 수술하러 입원한 참이다. 땀샘수술은 겨드랑이 털 몇 개를 지지는 수술 같지도 않은 수술 취급을 당한다. 지룡은 첫 등장 장면부터 지독한 땀냄새를 풍기고 있고 이인실의 사기꾼 남녀 진석과 미경은 그의 땀냄새에 진저리를 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단순히 웃음만을 위한 극은 아니다. 이 극의 부제는 ‘두 개의 비극에 대한 하나의 코미디’다. 사기꾼 진석은 우연히 지룡의 수술동의서에 보호자 서명을 하게 되고, 지룡은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고 뇌사상태에 빠지고, 진석은 지룡의 남쪽 고향인 강릉의 집안 재산을 노리고 가짜로 지룡 행세를 하면서 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개의 비극’- 지룡이 죽고, 대신 지룡 행세를 하게 되는 진석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석이 지룡 행세를 하다가 정신착란에 갇혀 병원에 수용되며 극은 끝난다. 


작품 <이인실>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인성'이라는 것이 소멸되지 않은 채, 이제 그 주체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어, 그 자체로서 후각이라는 독자적 생명력을 띠며, 주체를 괴롭히는 불편한 동거인' 으로 전락한 풍경을 보여준다. 진석에게는 사회의 불합리성에 대항하는 비극 영웅의 자질은커녕 <보이첵>의 주인공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위치"를 인지하는 '반~영웅적' 사고 조차 없다. 애초부터 그는 이 시대를 사는 여느 일반인처럼 이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과 정체성에 대한 개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라는 순리를 버리고 육지에 내던져진 물고기가 마르면서 진동시키는 악취처럼 자신 안에서 배 어나오는 악취의 출처가 자신의 내면 본연의 순리에서 어긋난 행동의 결과임을 끝내 모른다. 그 체취가 뒤틀리고 왜곡된 자신 고유의 내면 세계에서 묻어나는 울림임을 말이다. 작품 〈이인실)은 현재 배금사상에 오염된 "사고로서는 도저히 해독안되는 인간 안의 내면적 울림을 '떨구어낼 수 없는 불쾌한 감각'으로 물성화 시킴으로써 현대인들이 자처하는 정체성의 상실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조망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결코 끝내 소멸시킬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그 참을 수 없는 즉물적 성찰'을 유도하면서서, 현대 사회와 인간성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만의 독특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작가의 글 - 고영범
십여 년 전, 아이가 고약한 병원균에 감염되어 치료를 받아야 했던 적이 있었다. 문제가 발견된 후 항생제 처방을 받고 약을 썼지만 검사결과 별 차도가 없고 감염이 확산되는 것 같아 입원해서 보다 강도높은 처치를 받게 되었다. 시급하게, 단기간 입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문제가 세균 감염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입원환자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인실을 택했더랬다. 그게 계산착오였다는 걸 알게 되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알고보니 이인실은 모든 입원환자들이 육인실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쳐가는, 일종의 환승역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세균감염을 피하기는커녕, 온갖 종류의 다양한 환자들, 다양한 종류의 세균들이 그 방을 거쳐갔다. 그 중에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던, 공연히 싱글싱글 웃는 표정의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이제 막 수습과정에 들어선 외판원 같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들어와 빈 침대에 앉더니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가 공연히 엉덩이를 들었다놨다하면서 침대의 쿠션을 테스트해보기도 하고, 화장실을 들여다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TV를 틀었다가 생각보다 너무 큰 소리가 나자 후다닥 놀라며 사과하기도 했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그가 들고 있던 테니스 가방, 표정 모두가 70년대 잡지에서 바로 빠져나온 것 같아서, 당시 내 눈으로 보기에는 거의 천연기념물 수준이었다. 아무리 침대쿠션을 눌러보고, 공연히 건들거리면서 화장실을 둘러본들, 그 청년이 느끼고 있음에 분명한 낯섦, 곤혹스러움은 내게 그대로 전달되었는데, 기묘하게도 그건 어떤 뜨뜻함,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냄새 같은 형태로 전달되었다. 당황했을 때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면서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것 같은, 몸에 배어 있던 냄새들이 그 열기와 함께 올라오는 그런 느낌을, 분명히 그건 그의 느낌이었을텐데, 나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어색하게 인사를 트고 나서, 아이를 데리고 내려가 예정된 검사를 마치고 왔을 때 그 청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청년은 누구였을까. 왜 입원했던 것일까,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약에 취해 거의 항상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 새털처럼 많던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그 청년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썼다 지우고, 덧붙였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청년을 둘러싼 관계와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지만, 청년은 언제나 어디선가 떠돌아다니던 아이의 모습으로 남았다. 그 모습은 내가 실제로 만났던 그 청년의 그것이었고, 그 모습이 이 작품의 시작이자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청년은 결국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채 국경 어딘가를 헤매던 길 잃은 아이, 돌아가지 못하는 아이. 따라서 혼백만 남아 떠돌 수밖에 없는 아이의 이미지로 환원되었고, 그 아이가 사라지고 없는 빈 공간에는 기묘한 방식으로 그 아이의 혼백을 담고 살게 되는 일종의 명도로서의 사기꾼의 이미지가 들어섰다.

 

고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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